배우 박해진 씨의 손목에 걸려 있는 세월호 팔찌.
남지은의 TV와 연애하기
“티브이 좀 그만 봐!” 마감 빨리 하라는 부장의 재촉만큼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다. 방송연예 담당 기자에게 티브이를 보지 말라니. 국회 출입 기자한테 국회에 나가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방송연예 기자는 억울하다. 영화 담당이나, 책 읽는 게 일인 출판 담당 기자는 “문학적” 혹은 “문화적”이라고 평가하지만, 드라마 내용을 줄줄 꿰는 연예 기자는 ‘싼마이’ 취급이다. 책 기자가 회사에서 책을 읽으면 일이지만, 방송연예 기자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팔자 좋다~”가 된다. 뒤통수가 따갑다. 봐야 알고 알아야 쓴다.
이런 선입견은 연예인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티브이 속 모습이 그들의 인격체가 되곤 한다. 드라마에서 우아한 역을 도맡으면 실제 삶도 그럴 것이라 우러러보지만, 맹한 이미지로 나오면 실제로도 그런 줄 알고 폄하한다. <사랑과 전쟁>에서 불륜녀로 자주 나왔던 민지영은 “아빠와 걸어도 사람들이 수군댔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 연예인들은 고정된 이미지를 벗으려고 ‘개념’을 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에스엔에스(SNS)에서 ‘기획’된 목소리를 내거나, 기부 등 좋은 일을 하고 소속사를 통해 슬쩍 언론에 흘리기도 한다. 반복되면 어느새 개념인이 되어 있다.
‘개념 연예인’이 되는 전략이 횡행하는 연예판에서, 진짜 개념 충만한 연예인을 만나면 그래서 더 반갑다. 최근 만난 배우 박해진이 그렇다. 사회 돌아가는 것엔 관심이 없을 것 같던 그의 손목에는 세월호 팔찌(사진)가 빛나고 있었다. 일부 연예인들이 시끌벅적 가슴에 리본을 달고 뗐지만, 그 팔찌는 수개월간 조용히 그의 손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젠 습관처럼 차고 다닌다. 마음이 아파서 차마 뺄 수가 없더라”고 했다. 놀랍기는 배우 한주완도 마찬가지다. 막장 드라마로 데뷔해서일까, 책과는 거리가 멀 것 같던 그는 의외로 인문 도서를 즐겨 읽는 책벌레였다. 이데올로기를 논하고, 혼돈의 시대 배우의 역할론을 얘기한다. 시인 서효인이 오래전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연기자 한주완이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책을 여러 권 사갔다. 좀처럼 읽기 힘든 인문서도 있었다”고 쓴 적도 있다.
<개그콘서트>의 개그맨 김준현이 대학 때 등록금 투쟁을 했고, 지금도 술자리에서 밤새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토론하거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개그맨 김일희가 팟캐스트까지 챙겨 들으며 정치판을 줄줄 꿰고 있다는 걸 누가 알까. 지금은 예능에 자주 나오는, 거친 이미지의 전 농구선수 서장훈이 전지훈련을 갈 때마다 공항에서 사라져 찾아보면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더라는 증언 또한 기분 좋은 발견이다.
그들이 연예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이미지로 소비되느냐가 그들을 말해주지 않는다. 고로, 드라마를 봐야 하는 방송연예 기자라고 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건 오해! 라고 주장하며 리모컨을 들려는 찰나, 어김없이 잔소리가 시작된다. “티브이 좀 그만 보라니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왼쪽부터 배우 박해진, 한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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