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기자의 맛있는 TV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는 흥미로운 숫자가 등장한다. 142857이다. 이 숫자에 2부터 6까지 곱해보자.
142857×2=285714
142857×3=428571
142857×4=571428
142857×5=714285
142857×6=857142
눈치챘는가? 언제나 똑같은 숫자들이 자리만 바꿔 나타난다. 또 놀라운 사실은 142857의 제곱은 20408122449인데, 앞의 다섯 자리(20408)와 나머지(122449)를 더하면 142857이 된다는 거다. 일견 감탄스러우면서도 이보다 더 권태롭고 따분한 숫자도 없다. 1·4·2·8·5·7의 숫자 굴레를 못 벗어난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142857×7은 얼마일까. 계산기가 없다면 기다리길. 답은 마지막에 있으니.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142857’이 자꾸 생각난다. 겉으로는 기존 프로그램과 차별화하는 시늉을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빙빙 돈다. 사극만 해도 그렇다. <공주의 남자>, <뿌리 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의 성공으로 지금까지 ‘사극바라기’가 이어지고 있으나, 출생의 비밀, 천재적 능력, 신분을 초월한 사랑, 역경 극복이 차례만 바꾸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지금은 시련을 겪지만 나중에는 대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을 이미 안다. <불의 여신, 정이>가 시청률 답보 상태에 있는 이유다.
현대물도 마찬가지다. 간접광고주를 드러내기 위한 캐릭터 설정으로 보석·가방·구두·의류 디자이너가 꿈인 주인공들이 그들보다 능력은 부족한데 질투심은 많은 연적을 제압하고 종국에는 사랑과 성공 모두를 쟁취하는 이야기가 무한 재생된다. 억울한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나 ‘미드’(미국 드라마) <고스트 위스퍼러>에서 다뤄졌던 것이다. 하루의 이야기를 한 부에서 풀어내는 설정도 미드 <24>에서 이미 경험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직장의 신>·<여왕의 교실>·<수상한 가정부>까지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도 늘어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처럼 ‘142857의 법칙’에서 탈피하려는 드라마가 더러 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극히 일부다.
예능 프로그램도 다르지 않다. 초기에는 <1박2일>의 외국 버전 같던 <맨발의 친구들>은 갈수록 산으로 간다. 뜬금없이 다이빙을 하고 노래를 만든다. 닳고 닳은 소재다. 지상파 3사가 가을 개편에 따라 선보이는 예능도 그렇다. 새로움은 없고 ‘짝퉁’ 냄새만 진하다. <한국방송>(KBS)은 <꽃보다 할배>(티브이엔)의 할머니 판본 격인 <마마도>, 또 <문화방송>(MBC)의 <일밤-아빠! 어디가?>와 <나 혼자 산다>를 합쳐놓은 듯한 <아빠의 자격>(가제)을 준비 중이다. 여기에 유부남들의 요트 여행기까지 대기 중이라고 한다. 문화방송 <진짜 사나이>의 성공 때문인지 소방서(에스비에스 <심장이 뛴다>), 경찰서(한국방송, 제목 미정) 등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이 넘쳐나는 곳은 죄다 예능 소재로 끌어 모을 태세다. 관찰 예능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해야 멈출 폭주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도 있다. 하지만 남의 발자국만 쫓다 보면 퇴보와 공멸만 있을 뿐이다. 앞선 문제로 돌아가, 142857×7의 답은 999999다. 앞서 전혀 등장하지 않던 숫자가 여섯 쌍둥이 모습으로 등장한다. ‘999999’처럼 모두 같아진 다음 8이나 9를 곱한 ‘142857’ 모습은 어떨까. 궁금하지 않은가. 방송이든, 다른 현실이든.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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