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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출연료 못받고, 떼이고, 쪽대본…연기자들 ‘삼중고’

등록 2013-06-03 20:36

출연료 미지급액 31억
방송사 리스크 피해 외주제작
제작사 돈 갖고 튀어도 모른체

캐스팅 디렉터 과잉 요구
출연 대가 최고 30% 수수료까지
제작편수 줄며 불만있어도 말못해

일상화된 쪽대본 촬영
스태프 3개팀 나눠 밤샘 촬영
“‘연기하는 기계인가’ 비애감 들어”

“나도 3년 전에 200만원 남짓 떼였다. 제작사는 도망가고, 방송사는 끝까지 나 몰라라 하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동료들이 이번에는 제대로 받을 수 있을는지….”

꽤 긴 한숨이 이어졌다. 배우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연기자 ㄱ씨. 이름은 한번에 떠오르지 않지만 얼굴은 꽤 친숙하다. <문화방송>(MBC) <아들 녀석들>로 출연료 미지급 문제가 다시 떠오른 가운데, ㄱ씨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출연료 미지급에 대한 불안감, 캐스팅 디렉터의 횡포, 생방송과 다를 바 없는 ‘쪽대본’ 촬영 등 삼중고에 시달리는 연기자들의 삶을 털어놨다.

■ 적은 제작비→출연료 미지급 3월 종영한 주말극 <아들 녀석들>은 제작사인 투비엔터프라이즈 대표가 필리핀으로 잠적하면서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미정산 출연료가 6억8000여만원(한국방송연기자노조 추정)이다. 문화방송은 이미 투비엔터프라이즈에 제작비를 다 줬다는 입장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벌어질까. ㄱ씨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회당 1억2000만원의 미니시리즈를 찍기로 방송사와 제작사가 계약했다면, 남녀 주인공에게 최소 6000만원의 개런티가 나가고, 최대 6000만원으로 현장 스태프 급여와 장비 대여비, 컴퓨터그래픽(CG) 비용 등을 처리해야 한다. 답은 인건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고, 이게 축적되면 미지급 사태까지 벌어진다. 리스크(적자)를 떠안기 싫어하는 방송사가 현실에 맞지 않는 제작비로 제작사를 찍어누르는 게 제일 큰 문제다.”

한국방송연기자노조(한연노) 자료를 보면, 현재 지상파 외주 제작 드라마의 미지급 출연료가 31억7400만원에 이른다. 방송사는 제작사에 책임을 떠넘기고, 제작사는 폐업하고 잠적하면 끝이다. 종합편성채널(종편)이 생기면서 드라마 제작 편수는 늘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종편의 경우 드라마 제작비를 지상파보다 훨씬 적게 책정해, 메이저 제작사보다 자본금이 적고 검증되지 않은 신생 제작사가 뛰어드는 추세다.

ㄱ씨는 “출연료는 방송일 기준으로 다음달 말일에 지급된다. 5월 초 종영된 드라마의 출연료를 6월 말에 받는 구조로, 그사이 제작사가 방송사한테서 돈을 받고 튀어버리면 연기자만 자비 수백만원 들여 출연한 꼴이 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촬영 때 다치면 연기자들이 스스로 치료비를 감당하기도 한다.

■ 출연료 떼가는 캐스팅 디렉터 일부 캐스팅 디렉터는 제작사나 피디(PD)들과의 친분을 앞세워 조연이나 단역급 연기자에게서 최고 30%의 수수료를 떼간다. 지방 촬영 드라마에서 식비·숙박비를 포함해 회당 50만원을 받기로 했다면, 15만원 정도를 캐스팅 디렉터에게 준다. 승용차 기름값과 식비, 숙박비를 빼면 손에 쥐는 돈은 10만원꼴이라고 한다. 드라마 출연에 목마른 연기자들일수록 캐스팅 디렉터는 더 많은 수수료를 요구한다.

캐스팅 디렉터 얘기에 ㄱ씨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드라마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주는 캐스팅 전문가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몇몇은 전문가도 아니고 출연료를 중간에서 착취하는 거간꾼일 뿐이다.”

한연노에 등록된 연기자 수만 4500여명이다. 연기 학과나 학원을 거친 배우들은 해마다 수백명씩 쏟아지고, 가수들도 드라마에 기웃대면서 경쟁이 심화됐다. 그러나 드라마 회당 분량만 늘어났을 뿐 제작 편수는 크게 줄어 출연 기회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사적 관계를 앞세워 출연 경쟁을 뚫어주는 캐스팅 디렉터가 활개를 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조연과 단역 출연이 많은 <한국방송>(KBS) 대하드라마가 <대왕의 꿈>을 끝으로 잠정적으로 중단되면서 일자리는 더 줄게 됐다.

■ 일상화된 쪽대본 촬영 3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는 한 톱배우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다”며 한숨을 쉰다. 다른 유명 배우도 “드라마는 배우의 순간 암기력, 순간 집중력 등 순발력만 높여준다”며 씁쓸해한다. 쪽대본 촬영 현실 때문이다. ㄱ씨 말을 들어보자.

“미니시리즈는 보통 두 달 전부터 촬영하는 게 맞는데, 지금은 한 달 전부터 촬영하면 아주 훌륭한 편이다. 촬영이 곧 돈이기 때문에, 제작비가 빠듯한 제작사는 촬영 일수를 줄인다. 쪽대본 시스템으로 가니까 촬영 스태프는 3개 팀으로 나눠 돌리고 연기자는 쉴 틈 없이 카메라 앞에 선다. 밤새우고 현장에서 분장하면서 대본을 기다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링거 투혼’은 겉포장만 그럴듯할 뿐 참혹한 촬영 현장을 대변해준다.”

보통 방송사는 드라마 방영에 앞서 테이프 두 개를 준비해왔다. 한 개는 실제 방송용, 다른 한 개는 예비용이다. 최근에는 달라졌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요즘 70분 미니시리즈는 회당 테이프 7개가 기본이다. 10분마다 잘라 편집하고 방송에 곧바로 내보낸다. <적도의 남자>(2012년) 19회 때 검은 화면이 10여분간 계속된 것도 이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했다. <야왕>에 출연했던 권상우는 “마지막 방송 30분 전까지 드라마를 찍었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쪽대본과 밤샘 촬영이 일상화되면서 드라마의 질은 떨어지고, 정통 연기보다 자극적 얘기가 넘쳐나는 저급한 드라마가 양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ㄱ씨는 “쪽대본을 받으면 내가 연기하는 기계인가 하는 비애마저 든다. 요즘 드라마에는 배우는 없고 테크니션(기술자)만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한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현재 한연노는 △방송 뒤 15일 이내 출연료 지급 △일일 촬영 18시간 초과 금지 △대본 3일 전 출고 등을 명시한 표준계약서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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