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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로 남은 ’저자의 말’ 책에 ‘저자의 말’이 없다. 저자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우영 화백의 유작 <열국지>(자음과모음)가 이달 말 나온다. 책은 통상 작가의 말로 채우는 페이지 한쪽을 고스란히 비워둔 채 독자들을 만날 참이다. 고 화백은 본래 이달 말 출간 예정이던 <열국지>의 그림 원고를 두 달여 전 출판사에 모두 넘긴 뒤 ‘저자의 말’만 남겨둔 상태였다. <열국지>는 1981년 7월부터 83년 말까지 684회에 걸쳐 스포츠신문에 연재된 작품이다. 고 화백의 특장이 오롯하지만 원작의 지명도 때문인지 <삼국지>나 <수호지> <임꺽정> 만큼은 알려져 있지 않다. 550여년 동안 170여개의 나라가 흥하고 망하며 소용돌이쳤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영웅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난세의 급박한 맥박이 느껴지고 영웅의 철학이 전해지지만 고인의 해학과 세련된 그림, 필치로 만화는 ‘고우영표’를 찍으며 현대에 나온 또 다른 고전이 된다. 이번에 나오는 <열국지>는 작가가 직접 연재 당시 원본을 그대로 복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앞서 고우영의 <열국지>가 한 차례 나왔지만 적잖이 수정되거나 삭제된 채였다. 고 화백은 지난해부터 재발된 암으로 병원을 드나들면서도 세 달 가량 선을 다시 그리고 명암을 넣으며 원고를 보완, 수정했다. “만화도 하나의 예술이다. (신문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차라리 펜을 꺾는 길을 택했다.” 자신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던 신문 연재를 한때 그만두면서 남긴 말이다. 1988년부터 4년간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연임하며 그가 가장 힘을 썼던 대목은 협회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가입이었다. 새 <열국지>는 ‘원본 그대로’를 지키기 위해 당시 작업 중에 고 화백이 원고를 통해 독자들에게 남겼던 성탄절 연하장 따위도 그대로 담는다. 우리 만화의 품격을 위해서만 그랬던 것처럼, 이젠 더 이상 붓을 쥐지도 던지지도 못할 고 화백의 20여년 전 숨결이 전해질 듯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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