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담고 있던 조직에서 배신당한 뒤 울산에서 인천으로 도망 온 젊은 날의 장주원(류승룡)은, 오다가다 스친 다방 종업원 지희(곽선영)에게 한눈에 반한다. 강단 있고 꼿꼿해 보이는 인상도 좋고, 길치인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고 반복해서 길을 알려주다가는 끝내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운 채 데려다주는 선량함도 좋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주원은 지희가 일하고 있는 다방 이름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그냥 일하는 다방을 찾아갔으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심각한 길치인 주원은 다방을 찾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주원은 단순 무식하게도 지희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커피 배달을 시킨다.
마침내 주원이 숙박 중인 모텔 방으로 찾아온 지희는, 커피를 타다가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김용의 ‘영웅문’을 보고는 심드렁하게 묻는다. “무협지 좋아하나 봐요? 저거 싸우는 얘기죠?” 주원은 서툴지만 진지한 말투로 말한다. “아, 이거 그냥 무협지 아닙니다. 멜로 소설이에요.” 지희는 대충 맞장구쳐 주는 성의 없는 말투로 대답한다. “아, 네, 멜로.” 그러시겠지. 멜로라서 보시는 거겠지. 지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주원은 항변하듯이 덧붙인다. “아, 진짠데요. 무협지는 결국 다 멜로예요. 좋은 사람이 이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끝나요.”
남자들의 무협지 취향에 큰 관심이 없는 지희와 제 취향의 정당함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주원의 대화. 이런 대화는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프로레슬링 경기로도 이어진다. 다 끝난 경기 아니냐고, 진 거 아니냐는 지희에게 주원은 말한다. “쟤는 저러다가 끝에 가서 무조건 이깁니다. 헐크 호건, 좋은 사람이거든요.” 지희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말한다. “치, 뭐 좋은 사람은 무조건 이기나?” 주원은 대답한다. “끝까지 보면 이깁니다.”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의 11화 ‘로맨티스트’의 한 장면이다.
짧은 장면이지만 이것만큼 ‘무빙’을, 나아가 강풀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장면도 또 없다. ‘무빙’은 한국형 히어로물을 표방한 작품으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이들에겐 얼핏 능력자들이 싸우는 이야기가 본질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빙’의 본질은 따로 있다. 온몸이 찢기고 부서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초재생능력을 보유한 능력자가, 마음에 담은 여자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박스 테이프로 방바닥 먼지를 치우는 이야기. 주원의 말처럼 “좋은 사람이 이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끝나”는 이야기. 좋은 사람이 엄청난 고난을 겪고 궁지에 몰리기도 하지만 “끝에 가서 무조건 이기”는 이야기.
지난 23일 10화와 11화가 공개되면서 20부작의 반환점을 돈 ‘무빙’이 가장 절박하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가족’이다. 초재생능력을 보유한 주원도, 엄청난 오감의 소유자 미현(한효주)도, 모두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주원은 딸 희수(고윤정)가 고등학교 일진들과 17 대 1로 싸우는 일이 발생하자 합의금을 물어주기 위해 주저 없이 집을 팔아 치운다.
미현은 아들 봉석(이정하)이 혹시라도 부지불식중에 허공으로 떠오를까 봐 겁이 나서 아침마다 밥을 지어 고봉으로 담아서 먹인다.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능력자 ‘봉평’ 전영석(최덕문)과 ‘나주’ 홍성화(김국희) 모두, 제 목숨을 잃을지언정 자식들만큼은 지키기 위해 가족사진을 불태우고 입을 꾹 다문다.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능력자라 해도, ‘무빙’의 세계 속에선 제 주변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제 주변과 가족을 지키는 일이 초능력으로도 감당이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능력인가에 대해 강풀은 돌려 말하지 않는다. 2화의 한 대목, 어린 봉석(아역 한창민)은 친구들 앞에서 비행 능력을 뽐내다가 뜻하지 않게 친구를 다치게 한다. 미현은 아들인 봉석을 타이른다.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능력인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지키고 보듬는 것이 진짜 능력. 그것이 강풀의 세계관이다.
이처럼 인간의 선의를 믿고 또 중요시하는 강풀의 세계관은 종종 인물의 평면화를 피하지 못한다. 주원과 미현, 두식(조인성) 같은 부모 세대도, 봉석과 희수 같은 자식 세대도, 이렇다 할 고뇌나 고민 없이 정의롭고 선량한 사람들이다. 물론 일진들이 친구를 괴롭히는 걸 보고 언제 행동에 나서야 할지 고민했던 희수처럼, 때로 선을 뜻처럼 실천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선행은 잠시 유예되거나 상황에 막힐 뿐이고, 강풀은 결국 주인공이 선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이 결국엔 선량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의 이익과 선량함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입체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탓에, 강풀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독자나 시청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평면적인 캐릭터에 깊이를 부여하고 전형성을 피해 가기 위해, 강풀은 디테일을 늘리고 서사를 두텁게 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인물 자체에 선악의 입체성을 부여하는 대신, 선한 인물이 관통하는 감정과 상황을 최대한 두툼하게 묘사함으로써 평면성을 감추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희수가 봉석의 까진 팔꿈치에 밴드를 고쳐 붙여 줄 때, 시청자들은 봉석의 심장박동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함께 체험할 수 있을 만큼 봉석과 가까운 자리로 초대된다. 또 다른 예로, 부모 세대인 미현과 두식, 주원이 경험하는 고난은 보기 힘들 만큼 처절하고 엄혹하다. 주원은 새 삶을 살기 위해 울산과 포항에서 올라온 과거의 조직원들과 300 대 1로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미현과 두식이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국가폭력의 최전선인 안전기획부다.
그나마 서사를 두텁게 허락받은 선역과 달리, 악인을 묘사할 때 인물의 평면적인 묘사는 더 심해진다. 인간의 선의를 믿는 강풀은 그 선의를 저버린 사람들을 묘사할 때 가차 없어진다. 부모 세대 능력자들을 블랙 요원으로 활용한 안기부 제5차장 민용준(문성근)이나 그의 오른팔 여운규(김신록)는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감정 묘사나 이렇다 할 서사의 볼륨이 부여되는 일은 없으며, 작품의 가장 결정적인 흑막인 두 사람은 평면적인 묘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강풀의 태도는 마치 악은 악일 뿐,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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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원작을 본 사람들이라면, 극의 후반부엔 선과 악을 오가는 캐릭터들이 배치돼 있다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들 또한 천성은 선한데 상황이 그들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캐릭터에 가깝다. 이런 캐릭터 조형으로 20부작짜리 드라마를 버텨낼 수 있을까? 작가가 모든 요소를 통제할 수 있는 웹툰이라면 몰라도,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실사 영상 매체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강풀의 원작을 실사화한 작품들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건 이런 인물의 평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탓도 있다. 강풀은 인물의 평면성을 서사의 두께로 극복하는 작가인데, 2시간짜리 영화 안에 그 긴 서사를 축약하다 보면 인물이 생기를 잃고 납작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직접 각본을 쓴 강풀은 원작에는 없었던 새 캐릭터들을 투입해 입체성을 보강한다.
전반부의 서사적 긴장을 책임진 인물인 암살자 프랭크(류승범)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떼어 내진 채 미국의 살인 병기로 키워졌다는 전사를 지닌 인물로, 자신이 끌려가는 걸 못 본 체했던 어머니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는 악인이다. 봉석·희수와 같은 반 학생인 방기수(신재휘) 또한 흥미로운 캐릭터다. 능력자들을 모아 육성하는 정원고등학교의 실체를 알고 있으며, 능력자 테스트를 준비하다가 다리를 다치자 버림받은 존재. 그래서 담임 최일환(김희원)부터 능력자인 반장 강훈(김도훈), 나아가 학교 전체를 저주하고 증오하는 기수는,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쉽게 미워하기도 어려운 악인이다.
지난날 강풀 원작 실사판들은 원작의 명성에 걸맞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탓에 “강풀 원작은 영화화하면 실패한다”는 불명예스러운 징크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강풀이 직접 각본을 쓴 ‘무빙’은 어떨까? 현란한 능력을 지닌 능력자들이 “싸우는 이야기”로 시선을 끈 뒤, “좋은 사람이 이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끝나”는 이야기를 설득해 내는 데 성공할까? 반환점을 돈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인다. 영화 대신 드라마로 제작해 서사를 두텁게 확보한 덕에 인물의 평면성은 크게 도드라지지 않고, 적재적소에 배치한 새 캐릭터들은 극에 입체성을 더한다. 남은 9화에서도 이런 기조를 지켜간다면, 어쩌면 이번만큼은 원작에 걸맞은 성공을 거둘지도 모르겠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