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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국 미술판 지각변동…최대의 격변 밀려온다

등록 2021-06-07 04:59수정 2022-01-03 11:00

30~40대 젊은 컬렉터들 약진
‘이건희 컬렉션 신드롬’ 새바람
글로벌 큰손들 한국 진출에 기대감
“미술판 기초체력 부실” 우려도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전시 전경. 한국화랑협회 제공
201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전시 전경. 한국화랑협회 제공
지각변동이 곧 일어날까? 초여름을 맞은 한국 미술판이 묘한 활력에 휩싸여 있다. 세계 미술계 변방에서 폐쇄적이고 빈약했던 국내 국공립 미술관과 미술 시장의 지형도가 뿌리째 흔들리며 격변할 조짐이다. 올봄 미술계에 전무후무한 사건과 현상이 잇따르면서 국내 미술 시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1980년대 이래 가장 큰 격동과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당장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의 구매층이 확 바뀌었다. 전문직 중심의 30~40대 젊은 투자자들이 대거 어르신 컬렉터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거래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또 영국에서 2000년대 초 창립한 세계 굴지의 미술품 판매 전람회인 프리즈가 한국화랑협회의 장터 키아프와 함께 내년부터 서울에서 아시아권 장터를 열기로 했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이 국립기관 두곳에 기증된 것도 대중의 인식을 일변시켰다. 이런 요인들이 한꺼번에 작용하면서 미술판과 미술 시장은 전례 없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젊은 투자자 혹은 애호가들

“일면식도 없던 젊은이들이 가게에 휙 들어와 그림을 유심히 보더니 바로 값을 치르고 사갔어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신기할 뿐이었어요.”

서울 북촌에 작은 화랑을 꾸리고 수십년간 거래를 해온 60대 화상 ㅈ씨가 전한 체험담이다. 그는 지난달 인간 군상 작업을 하는 무명작가 ㅇ씨를 섭외해 데뷔 소개전을 치른다 생각하고 전시를 꾸렸다. 지인 컬렉터들에게 얼굴을 알린다는 목적이어서 판매 성과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막 며칠 뒤부터 디자이너, 금융인 등 젊은 애호가들의 발길이 잇따랐다. 대부분 지인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해 전시 및 미술계 동향 정보를 교환하거나 작가 인스타그램 등 에스엔에스(SNS) 이미지를 미리 보며 상당히 숙지하고 온 이들이었다. 작품값은 300만~500만원 정도였지만, 기존 컬렉터들처럼 깎으려 들지 않고 카드로 바로 결제하는 것도 달랐다. 오랜 인연을 맺은 기업 컬렉터와 교류하면서 작품을 소개하고 깎아주는 걸 당연한 관행으로 여겼다는 업주 ㅇ씨는 “기존 컬렉터의 시장 관행과 전혀 다르다.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투자하면서 시장의 면모를 바꿀지 궁금하다”고 했다.

지난달 판매나 관객 동원 면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둔 국제 미술품 장터 아트부산의 특별전 현장. 관객들이 덴마크 출신 거장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빛 미디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판매나 관객 동원 면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둔 국제 미술품 장터 아트부산의 특별전 현장. 관객들이 덴마크 출신 거장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빛 미디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지난달 성황리에 끝난 부산 국제장터 아트부산에 젊은 작가 작품 70여점을 출품했던 ㅈ갤러리의 ㄱ 대표도 관객 행렬에 입이 벌어졌다고 했다. “팬데믹 사태로 2년여 만에 아트페어에 나갔고 부산은 처음이라 아는 컬렉터도 없었는데, 서울과 부산 지역에서 골고루 젊은 구매자들이 찾아와서 줄줄이 작품을 사가더라고요. 믿겨지지 않았어요.”

컬렉터들이 가격 주도권을 쥔 화상들의 조언을 받아 작품을 점찍고 밀실 흥정을 하는 화랑가 관행이 사라지고 있다. 4~5년 전 스타트업이나 금융업으로 큰돈을 만진 젊은 기업가 사이에서 재테크 수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미술품은 합리적이면서 주관적 감성도 중시하는 요즘 30~40대 직장인들에게 투자 상품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들은 작가 에스엔에스나 영향력 있는 지인 등을 통해 작품 정보를 입수·분석한다. 깊이 있는 안목을 갖추고 새로운 작가군을 찾는 게 아니라 안전자산인 기존 인기 작가의 작품들이나 젊은 작가들의 팝아트적 소품을 쇼핑하듯 사는 것이 특징이다. 마음에 들면 에누리 없이 거래하고, 또래 작가·컬렉터들과 커뮤니티 교류, 파티 등도 즐긴다. 억대 작품을 수십명이 수백만원씩 나눠 사들이는 분할 구매도 유행하고 있다.

지난 5월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기증작품 설명회 모습. 연합뉴스
지난 5월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기증작품 설명회 모습. 연합뉴스
■ 이건희 컬렉션이 깨우쳐준 수집의 힘과 매력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의 여파도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젊은 컬렉터들 사이에 이건희 컬렉션 신드롬이 일면서 구매 행렬이 쇄도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일면서 지역 미술 인프라, 콘텐츠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 서울 성수동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한 갤러리 전시장에서 만난 30대 컬렉터 ㄱ씨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보면서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수집하면 금전적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사회에도 큰 힘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또래 세대에게 수집의 멋과 매력을 일깨워줬다고 본다”고 말했다.

10여년 전 호황기와 지금 상황을 비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때는 ‘기승전삼성’일 정도로 시장 거래액의 절반 가까이를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 관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범삼성가 컬렉터들이 점유하며 막강한 수요자로 군림했다. 지금은 ‘컬렉터 삼성’의 존재가 사라지고 젊은 투자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투자를 촉진하는 배경이 삼성의 이건희 컬렉션이란 점이 흥미롭다.

2019년 한국화랑협회 주최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 전시장의 모습. 한국화랑협회 제공
2019년 한국화랑협회 주최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 전시장의 모습. 한국화랑협회 제공
거센 변화 바람 예고하는 프리즈의 한국 진출

“어떻게 솎아낼지 벌써부터 골치 아픕니다.” 한국화랑협회 간부들은 지난 3일 마감된 올해 국제미술장터 키아프의 참가 화랑 명단을 보면서 고민에 빠져 있다. 예년엔 많아야 230여곳의 국내외 화랑이 참여했는데, 올해는 무려 280여곳에 이른다. 코로나19 상황인데도 하우저 앤 워스, 페이스 같은 서구 명문 화랑을 포함해 국외 화랑만 50곳 넘게 신청서를 냈다. 사용하기로 예약한 서울 코엑스 에이·비(A·B)홀은 170여개 업체밖에 수용할 수 없다. 110곳 넘는 화랑을 심사로 솎아내야 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가 한국화랑협회의 장터 키아프와 함께 내년 연합 장터를 꾸리기로 지난달 발표했기 때문이다. 1회 행사 매출액 규모가 1조원대 안팎인 세계 굴지의 작품 유통 플랫폼이 연간 미술시장 매출액 5000억원 수준의 한국에 개설되면서 또 다른 공룡 장터인 홍콩 아트바젤과 맞수 구도를 형성한 셈이다. 키아프 행사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것은 당연지사다. 지난해 <한겨레>가 단독 보도했던 키아프+프리즈 공동 페어가 공식화하면서 국외 큰손들과 명품 갤러리들이 본격적으로 몰려올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시장 매출 총액이 기존 5천억원에서 1조원대로 올라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협회 쪽은 올해 키아프 매출액만 1천억원 이상을 목표로 잡았다. 내년 프리즈 공동 행사에서는 무려 3천억원 넘는 매출을 올린다는 구상을 세웠다. 2019년 매출액이 300억원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던 데 견주면, 엄청난 목표다.

앞서 부산을 대표하는 국제장터 아트부산도 대폭 약진했다. 지난달 13~16일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올해 장터에선 역대 최대인 7만5천여명의 관객이 들었고, 매출액 또한 역대 최고인 300억여원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다. 국외 저명 화랑들도 국내 지점들을 잇따라 개설하는 중이다. 페이스갤러리 한국점은 지난달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초입에 국내 최대급의 화랑 전시장을 갖춘 신축 매장을 선보였다. 서구 굴지의 화랑인 하우저 앤 워스와 타데우스 로파크가 잇따라 서울 지점과 사무소를 여름 이후 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의 쾨니히는 지난 4월 서울 청담동 패션매장에 입점했다. 새 시장으로 떠오른 부산을 놓고 한국화랑협회 키아프는 부산화랑협회 페어를 흡수해 키아프 부산을 꾸리는 계획을 추진 중이어서 아트부산과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매달 100억원대 이상의 대형 장터를 꾸리고 있는 서울옥션 등 경매사와 갤러리 현대 등 일부 메이저 화랑은 최근 서구에서 관심의 초점이 된 엔에프티(NFT) 가상 작품 판매에 눈독을 들이면서 온라인 시장 확보에도 나서는 모습이다.

최근 스위스 베른미술관에서 열린 남북한 현대미술전에 출품돼 세계 미술계의 눈길을 모은 이세현 작가의 <붉은 산수> 연작 중 일부. 노형석 기자
최근 스위스 베른미술관에서 열린 남북한 현대미술전에 출품돼 세계 미술계의 눈길을 모은 이세현 작가의 <붉은 산수> 연작 중 일부. 노형석 기자
세계 미술계에서 최근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주요 작가들이 대형 전시를 통해 각별한 주목을 받는 양상이 이어지는 것도 고무적이다. 현재 스위스 베른미술관에서는 거장 컬렉터 울리 지크가 수집한 남북한 작가들의 현대미술전(9월5일까지)이 마련돼 <뉴욕타임스> 등 국외 언론들의 취재가 이어지고 있다. 내년 9월부터 내후년 2월까지 미국 엘에이카운티뮤지엄(라크마)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국외 전시로는 역대 최대규모인 ‘한국의 근대미술(가칭)’ 전이 개최되며 내후년에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이승택, 김구림, 성능경, 이건용, 이강소 등 한국의 1960~70년대 실험미술 대가들을 소개하는 기획 특별전이 열린다.

■ 판은 깔리는데 내놓을 새 콘텐츠가 없다 ♣ ]

하지만 이런 격변에 대응할 만한 한국 미술판의 기초체력은 부실하다는 우려가 적지않다. 당장 1970년대 원로작가들의 단색조회화와 실험미술 외에는 대체할 만한 예비스타 작가들의 공인된 계보가 사실상 없다. 시장은 들썩거리지만 그 성과를 고스란히 받아안을 콘텐츠와 기본 역량이 형성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지금 세계 미술시장에선 형상성이 강한 구상회화가 대세인데 비해, 한국 시장에서만 단색조 회화 같은 수십년 전 추상 작품이 여전히 득세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다”며 “작가군이 다양하지 못한 한계를 딛고 잠재력 있는 새 콘텐츠를 내놓지 못하면 거래 작품의 규모와 수준에서 압도적인 서구 미술자본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한 사설업체가 엔에프티(NFT) 경매에 출품하겠다며 공개했던 김환기 그림. 환기미술관과 재단 쪽이 저작권 침해와 진위 문제를 제기하자 업체는 경매 행사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 근대 대가 작품의 엔에프티 경매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워너비인터내셔널 제공
최근 한 사설업체가 엔에프티(NFT) 경매에 출품하겠다며 공개했던 김환기 그림. 환기미술관과 재단 쪽이 저작권 침해와 진위 문제를 제기하자 업체는 경매 행사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 근대 대가 작품의 엔에프티 경매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워너비인터내셔널 제공
화랑협회는 내년에 프리즈와 함께할 키아프에서 한국 미술계를 위한 시장 육성 대책에 대해 원론적인 수준의 언급을 내놓고 있다. 젊은 작가들의 패기 넘치는 작품을 선보일 위성 장터를 코엑스 인근 세덱스에 마련하겠다는 공약이다. 평론가가 원하는 작가와 함께 쌍을 지어 작품을 소개하는 별도 아트페어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회원 화랑의 절반 이상은 작가 발굴을 거의 하지 않는 2차 거래 업체들이다. 이런 실정에서 화랑·미술관·평단의 신뢰 협력 관계에 바탕을 둔 작가 육성 시스템을 외면하고 국외 대가들 작품에만 매달려온 관성이 바뀔지는 미지수다.

물 들어오니 배 띄워 노를 젓고 나아가야 한다는 데는 미술인들의 인식이 일치한다. 다만 계속 노를 저을 수 있을지, 띄워야 할 배를 얼마나 튼실하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견과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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