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모두가 거부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된다.”(패션 디자이너 미우다 프라다)
남다른 외모와 성정으로 인해 모두로부터 거부된 주인공이 세상을 향해 벌이는 아름다운 복수라는 점에서, 프라다의 말은 영화 <크루엘라>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보인다. 26일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 <크루엘라>는 천재의 괴팍함으로 주위와 불화하던 에스텔라(엠마 스톤)가 남작부인(엠마 톰슨)을 만나고 충격적 진실을 마주하면서, 영국 패션계의 이단아 ‘크루엘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다.
엄마와 영국 소도시에 살던 에스텔라는 흑백으로 양분된 머리 때문에 사내아이들로부터 괴물이라고 놀림받는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에스텔라는 애들을 때려 눕혀 결국 자퇴하기에 이른다. 엄마와 함께 런던으로 가던 길에 들른 대저택에서, 달마시안의 공격으로 엄마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숨지게 된다. 홀로 런던으로 온 에스텔라는 우연히 만난 길거리 소년 재스퍼(조엘 프라이),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와 가족처럼 지낸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에스텔라가 만든 다양한 옷으로 위장한 채 이들은 3인조 절도를 벌인다.
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절도 행각이 시들해질 무렵,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떠올린 에스텔라에게 제스퍼는 가짜로 만든 리버티 백화점 채용합격증을 내민다. 당대 패션의 요람인 리버티 백화점에 기적적으로 취직하지만, 에스텔라에게 주어진 일은 화장실 청소 등 허드렛일뿐. 홧김에 술을 마신 에스텔라는 백화점 쇼룸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꾸민 뒤 잠든다. 다음날 우연히 리버티 백화점에 온 런던 패션계의 독재자 남작부인은 에스텔라가 만든 쇼륨을 보고 자신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채용한다. 에스텔라는 천부적인 능력으로 단박에 까탈스런 남작부인의 눈에 들며 승승장구한다.
여기까지 보면 이 영화는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해 패션리더로 도약하는 내용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197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단순한 성장담이 아니다.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된 에스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크루엘라라는 전복적 패션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크루엘라가 가려는 길 끝엔 통쾌한 복수극이 놓여 있지만, 그 복수의 대상은 비단 한 개인을 넘어 자신을 순종적인 캐릭터로 살도록 강요한 세상 자체인 것으로 읽힌다.
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실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시나리오 작가 엘라인 브로쉬 멕켄나가 각본에 참여한 이 작품은, 패션에 관심 많은 이들이라면 두시간여 동안 쉼없이 선보이는 코스튬(의상)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된다”는 프라다의 말처럼, 크루엘라의 스타일은 70년대 말 보수적인 영국 사회를 뒤흔든 펑크룩과 글램룩의 부상을 화사하게 재현해낸다. 크루엘라가 청년들의 하위문화, 이른바 ‘유스 컬처’를 대변한다면, 남작부인은 사치스럽고 권위적인 기득권의 패션을 상징한다. 각각 알렉산더 맥퀸과 크리스찬 디올에서 영감받은 의상들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제니 비번이 만들었다. 도리스 데이의 ‘퍼햅스, 퍼햅스, 퍼햅스’ 등 재즈부터 펑크록, 팝까지 다양한 음악이 흐르는 장면을 감각적인 뮤직비디오처럼 연출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두 ‘엠마’의 만남으로도 화제가 된 <크루엘라>는 독자적인 영화로 보이지만, 사실 디즈니 고전인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의 프리퀄(앞 이야기)이자, 기존 영화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 등을 가져와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스핀오프’ 영화다. 원작에서 주인공 부부의 달마시안 새끼를 훔쳐 개가죽 코트를 만들려는 악당이 바로 크루엘라 드 빌. 이름마저 ‘잔인한’(cruel)과 ‘악마’(devil)를 결합한 말장난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 <크루엘라>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지만 내면은 너무나도 추레한 등장인물을 통해, 영화 <크루엘라>는 가난한 영혼이 비싼 옷을 걸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두 여자 주인공에 비해 남자 배우들이 모두 조연으로 물러 앉은 점도 남다른 지점이다. 착한 척하지 않고 기성의 질서에 도전하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크루엘라는 21세기의 ‘걸크러시’를 집약한 캐틱터 같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안티히어로물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