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 한 장면.
테리와 팻은 미국 시카고에서 65년째 함께 살고 있다. 테리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고, 팻 역시 허리가 아프다. 이들이 26년이나 함께 살고 있는 집은 이제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다. 테리에게는 딸처럼 여겨온 조카 다이애나가 있다. 다이애나는 테리의 건강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얼른 노인요양시설에 입주하거나 다이애나가 살고 있는 캐나다로 오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권한다. 팻은 캐나다는 추워서 싫고,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둥 핑계를 대며 계속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건강은 빠르게 나빠져 가고, 둘의 추억이 서린 집을 이제는 떠날 수밖에 없다. 먼지 쌓인 물건을 정리하면서 회한에 젖는 둘. 테리의 조카들은 둘을 좋은 요양시설에 모실 수 있음에 기뻐한다. 이쯤에서 당신이 테리와 팻을 어떤 인물로 상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큐멘터리 <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2020, 크리스 볼런 감독)의 주인공 테리와 팻은 레즈비언이다. 두 여성의 운명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지막 나날들을 그리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행복한 홈드라마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 둘의 사랑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쾌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이 두 여성이 긴 세월 비밀을 지키느라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를 상상하면 단순히 행복한 러브스토리로만 바라볼 수 없다.
1940년대 미국에서 여자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던 테리 도너휴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팻 헨셜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을 원하지 않았던 팻과 테리는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는 시카고로 이주한다. 그러나 1950년대의 시카고는 성소수자들에게 엄청난 폭압의 공간이었다. 경찰은 성소수자들이 즐겨 찾는 술집들을 불시에 단속하여 그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하고, 직업과 이름을 공개했다. 많은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낙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이민자 신분이었던 테리와 팻 역시 송환을 우려하여 조심해야 했다. 또한 팻과 테리는 서로의 사랑을 숨겨야 했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가족들에게도 왜 둘이 같이 사는지 늘 변명해야 했다. 테리의 오빠는 테리가 남성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팻과 테리가 서로 주고받던 편지는 하나같이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을 법한 편지지 하단이 찢겨 나가고 없다. 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 그 편지를 보고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워 편지의 말미를 모두 찢어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다. 이 다큐멘터리의 원제가 <시크릿 러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를 사촌이나 절친이라고 소개해가며 그렇게 비밀스럽게 지켜온 관계를 이들은 인생의 마무리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내고, 결혼하기로 한다. 죽음의 순간에 가족으로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배제되거나 홀로 남은 파트너가 빼앗길 배우자로서의 권리 같은 것들이 실감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외려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당당했던 테리가 가장 사랑하는 조카 다이애나에게 커밍아웃하기로 결심해놓고 덜덜 떨며 두려움에 입을 떼지 못했던 순간을 고백할 때, 서글픔이 느껴졌다. 시대가 변했고, 동성혼이 합법화된 미국이지만 가족에게 절연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다큐멘터리 속 가족들이 모두 그들의 사랑에 축복과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팻의 남동생은 팻에게 가족들에게 상처 주지 말고 조용히 커밍아웃할 것을 주문한다. 65년의 아름다운 사랑이 그들에게 배신감으로 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의 내면에 뿌리박힌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몇년 전 뉴스가 떠오른다. 레즈비언 커플 중 한 분이 돌아가시자, 남은 파트너가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 여전히 한국은 성소수자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는커녕 차별하지 말라는 말조차 어려운 사회이다. 혐오의 언설이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 행동이 이제 곧 시작된다. 정체성 하나 때문에 차별을 당해도 좋은 존재는 없다. 테리와 팻처럼 인생의 동반자와 마지막을 함께할 권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음을 모두가 알게 되기 바란다.
영화감독
▶ 강유가람 감독은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