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복> 스틸컷. 약물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전직 정보국 요원 민기헌(공유)은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씨제이이엔엠 제공
죽음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질이다. 죽음은 알 수 없어 두렵고, 체험되지 않아 무섭다. 한 작가의 표현대로 인생의 스포일러는 누구나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간명한 진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용주 감독의 신작 <서복>은 너무도 익숙해서 외면해온 죽음이라는 화두를 에스에프(SF) 장르로 풀어낸 영화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약물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전직 정보국 요원 민기헌(공유)은 어느 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는다.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라는 임무가 그것. 항구에 정박된 거대한 선박 안으로 들어서자, 극비리에 인간복제 실험을 진행해온 서인그룹의 연구실이 나타나고, 기헌은 그곳에서 서복과 조우한다. 연구자이자 서인그룹 대표이사인 신학선(박병은)은 기헌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진시황의 명에 따라 긴 여행길에 오른 신하 서복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말한다.
영화 <서복> 스틸컷. 약물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전직 정보국 요원 민기헌(공유)은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씨제이이엔엠 제공
10년 전 유전자 조작과 줄기세포 복제를 통해 만들어진 서복은 성장 속도가 인간보다 2배 빠르다. 또한 그의 척수에서 생성된 단백질은 인류가 앓고 있는 모든 질환을 치유할 수 있다. 서복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기헌에게 연구진은 주변의 사물을 염력으로 움직이는 서복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다.
정보국 요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어딘가로 향하던 기헌과 서복은 외인부대의 공격을 받고 억류된다. 트럭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한 둘은 여러 세력에 쫓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사이 서복을 납치하려는 자들의 추격은 가까워오고, 둘의 운명은 끝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든다.
영화 <서복> 스틸컷. 복제인간인 서복은 다른 인간들처럼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났지만,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씨제이이엔엠 제공
제작비 160억원을 들인 대작 <서복>은 죽음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에스에프라는 당의정으로 먹기 좋게 만든 장르영화다. 극의 흐름과 전개는 매끄럽고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두 주연배우의 팬이라면 기헌과 서복이 티격태격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의 ‘케미’에도 눈길을 빼앗길 법하다. 특히 극 초반 무표정하고 건조한 톤으로 복제인간을 연기하던 박보검이 후반부에서 점차 감정을 증폭시키는 대목은 몰입을 극대화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와 죽음을 목전에 둔 시한부 인생의 동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영생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되묻는다. 서복 또한 다른 인간들처럼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났지만,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가 살아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유다. 막판에 서복이 선택한 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복제인간 탄생에 관여한 연구원 임세은(장영남)의 “사람들 참 겁 많죠? 욕심도 많고”라는 대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 존재의 숙명과 함께 이마저도 극복하려는 욕망의 부질없음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서복>의 주제의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 <서복> 스틸컷. 서복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정보국 부장으로 출연한 배우 조우진은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를 선보인다. 씨제이이엔엠 제공
1990년대 들어 한국 영화계는 장르영화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작가적 시선을 견지하는 감독들로 인해 르네상스를 이뤘다. 그 계보를 잇는 이 감독은 종교적 광신이 한 소녀를 어떻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를 오컬트 장르로 버무려낸 <불신지옥>(2009)으로 데뷔했다. 2012년엔 멜로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첫사랑 신드롬’을 낳으며 작품성과 흥행에서 큰 성취를 거뒀다. 이 감독은 지난
12일 언론시사회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에스에프 장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의도적으로 기존과 다른 장르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직조하는 과정에서 적합한 장르를 선택한 결과”라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난해부터 개봉이 계속 연기돼온 <서복>은, 15일 극장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오티티) 티빙에서 동시 개봉한다. <승리호> <사냥의 시간> <낙원의 밤> 등 한국 영화 기대작이 극장 개봉을 건너뛰고 넷플릭스로 직행한 적은 있지만, 극장과 오티티 동시 공개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탄탄한 연출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형 웰메이드 에스에프 영화의 출현이 흥행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15살 관람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