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드라마 속 역사 왜곡, 중국 문화 침투 현상이 잦자 이를 비판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선구마사>는 시청자 항의에 방송 2회 만에 폐지됐다. 시청자의 요구가 당연하다는 주장과 함께 창작자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각 방송사 제공
‘창작자는 역사를 기반으로 창작을 개시하는 순간부터 실존 인물을 존중하고, 역사적 사실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수의 인권을 대변하는 문화유산임을 명심하고 유의해야 한다.’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제이티비시>(JTBC) 사옥 앞. 한 트럭에 설치된 전광판에 이런 글귀가 떴다. <제이티비시>가 오는 6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설강화>가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및 독재정권을 미화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용 수정을 요구하며 트럭 시위를 벌인 현장이다. 한 커뮤니티에서 ‘역사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200여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그중 한명인 김예서(가명·30대)씨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설강화>에 서브 남자 주인공이 안기부 팀장으로 나오고, 그를 대쪽 같은 인물로 설명한다고 들었다. 안기부 팀장에 멋진 서사를 입혀 그 사람의 행적에 설득력을 주면 우리나라 민주화 정신이 훼손될까봐 걱정돼 행동에 나섰다”고 말했다. <제이티비시>는 “미방영 드라마의 시놉시스와 캐릭터 설명 일부 등 단편적인 정보들이 왜곡됐다”며 “민주화운동 투사 천영초씨 이름과 유사한 여자 주인공, 은영초 이름은 수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사람들의 의구심과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누리꾼 200여명이 모금에 참여한 트럭 시위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제이티비시> 사옥 앞에서 열렸다.(오른쪽) 이들은 방영 예정인 드라마 <설강화>(왼쪽)가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 및 독재정권을 미화할 우려가 있다”며 내용 수정을 요구했다. 제이티비시, 커뮤니티 제공
<조선구마사>(에스비에스)에서 촉발된 ‘역사 왜곡 드라마를 뿌리 뽑겠다’는 시청자들의 의지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방영 중인 드라마뿐만 아니라 방영을 앞둔 드라마까지 잘못된 점을 찾아내며 사전 예방에 나서고 있다. <조선구마사>는 태종이 백성을 학살하는 장면에다, 조선시대 배경에 중국 음식, 중국풍 소품이 등장한 데 대해 시청자 항의가 빗발쳐 방송 2회 만에 폐지됐다.
<제이티비시>가 하반기에 선보이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도 시청자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중국 소설 <장야난명>(동트기 힘든 긴 밤)으로, 출간 당시 시진핑 정부 선전 소설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원작에 녹아 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캐릭터 등을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했고,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내용이라고 알려졌지만, 시청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한 커뮤니티 이용자는 “이 소설 작가는 홍콩 민주화운동가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던 사람”이라며 “한국 실정에 맞게 바꿀 거면 굳이 시진핑 정부 찬양 의혹을 받았던 소설을 갖고 올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중국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아이치이가 첫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해 5월 방영 예정인 <간 떨어지는 동거>(티브이엔), 중국 웹소설 원작의 <잠중록>(티브이엔), 세종대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중 군주들의 삼각관계 로맨스를 다룬 <해시의 신루> 쪽도 긴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배경에 중국 음식과 소품을 사용한 <조선구마사>. 에스비에스 제공
역사 왜곡 논란은 사극이나 시대극 방영 때마다 되풀이되는 해묵은 문제다. 퓨전 사극이 등장하고 인기를 끌면서 더 잦아졌다. 사실과 상상의 경계선은 제작진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고민이었다. 2011년 작품성을 인정받은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스비에스)에서도 광평대군의 죽음 등에 대한 왜곡 지적이 나왔다. 김영현 작가는 당시 간담회에서 “고증을 통해 사실에 맞추려 했지만, 주제를 좀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자유롭게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청자 항의에 설정을 바꾼 적도 있다. 2013년 <기황후>(문화방송)는 악행과 패륜을 일삼은 폭군인 고려 충혜왕을 자주적이고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영웅으로 묘사했다가 왜곡 논란으로 한바탕 곤혹을 치른 뒤 가상 인물인 왕유로 변경했다. 당시 <문화방송> 관계자는 지난 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기황후>는 역사 왜곡의 정점에 선 작품이었다. 주로 어른들의 전화·게시판 항의가 많았다”며 “지금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무섭게 불타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 등으로 역사에 민감한 상황에서, 드라마에서 연이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문화를 침탈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분노가 폭발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편의점에서 중국식 훠궈를 사 먹는 장면이 나온 <여신강림>. 티브이엔 제공
최근 몇년 새 중국 투자를 받거나 중국 제작사가 참여해 만든 작품이 많아진 가운데, 지난해부터 우리 한복과 김치를 겨냥한 중국의 ‘문화 동북공정’ 시도에 따른 반중 정서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구마사> 제작사인 스튜디오플렉스·크레이브웍스·롯데컬처웍스는 “100% 우리 제작비로 만들었다”고 밝혔지만, 스튜디오플렉스 모회사인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의 지분 일부를 중국 텐센트와 웨이잉의 합작투자사가 갖고 있다는 점을 시청자들은 주시한다. 윤석진 교수는 “한국 시청자보다 중국 시장,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국 협찬사와 피피엘(PPL·간접광고) 계약을 한 <여신강림>(티브이엔)에는 한국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훠궈를 사 먹고, 버스 정류장 광고판엔 중국어 포스터가 붙어 있다. <빈센조>(티브이엔)에는 주인공 송중기가 중국식 비빔밥을 먹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됐다. 한 시청자는 개인 블로그에 “송중기가 포장에 중국어가 적힌 비빔밥을 먹는 걸 보고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고 썼다. <빈센조>의 피피엘은 2억~3억원 규모로 알려졌다. 논란이 되자 제작진은 피피엘을 중단하고 문제가 된 장면을 오티티에서도 삭제했다. <시지프스>(제이티비시)의 주요 배경인 아시아마트가 중국 물품을 파는 곳으로 나오는 걸 두고도 시청자들은 제작사 제이티비시스튜디오가 중국 기업 텐센트로부터 10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사실과 연결지어 해석한다.
중국식 인스턴트 비빔밥이 등장한 <빈센조>. 티브이엔 제공
중국 자본에 자존심을 팔 수 없다는 심리와 더불어 요즘 젊은 세대의 특성도 반영됐다. 김예서씨는 <설강화> 속 역사 바로잡기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역사를 잘 알면 (드라마 속) 사실과 거짓을 구별해낼 수 있지만, 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기황후> 내용을 다 진실로 여겼다”며 “요즘은 모든 드라마를 국외에서도 볼 수 있고, <설강화>는 케이(K)팝 걸그룹 멤버(블랙핑크 지수)가 주인공인 만큼 국외 팬들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문제 제기로 <조선구마사>가 2회 만에 폐지된 사례도 과거에 견줘 다른 세대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는 “소셜미디어를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적극적인 자기 의견을 표현 도구로 삼는 엠제트(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세대)는 어떤 기업이 비리나 문제를 일으켰을 때 굉장히 적극적으로 에스엔에스(SNS)에서 불매운동을 한다. 그런 흐름에서 드라마도 하나의 상품이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구마사>의 박계옥 작가는 “의도적으로 역사 왜곡을 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하면서도 “제작 과정에서 안일했음은 인정”했다. 드라마 제작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방송사 자본만으로는 콘텐츠를 만들기 힘든 상황에서 창작자들은 중국 자본을 ‘단비’처럼 여겼다. 차이나 머니가 드라마 제작에 스며들어 케이 콘텐츠에 힘을 실어준 것도 사실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투자자가 원하는 대로 제작해도 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왜곡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제작진의 안일한 생각으로,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남파 간첩이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 소품을 파는 상점이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시지프스>. 제이티비시 제공
케이 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시청자들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만큼 제작진도 실화를 다룰 때는 책임감을 갖고 여러 측면을 고려해 제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역사의식이 탄탄하게 영글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은 따져봐야 할 지점이다. 경기도 고양시 백송고등학교의 박명구 역사 교사는 “학생들은 게임이나 드라마 속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다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측면에서 역사 소재 드라마나 영화 제작은 필요하지만, 흥미로만 접근하면 사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고 말했다. 윤석진 교수는 “새로운 세대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지금 사회 분위기가 제작진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드라마의 역사 왜곡 문제에 관한 새로운 잣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짚었다.
반면 시청자 압력에 드라마가 폐지되는 사례가 창작 활동을 위축시키고 제작 기회를 앗아가 사극과 시대극의 퇴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현대사를 소재로 준비 중이던 한 드라마는 최근 사례를 보며 제작 중단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드라마 피디는 “우리나라 방송사와 기업 특성상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 걸 두려워하므로 ‘차라리 만들지 말자. 엮이지 말자’는 생각이 강하게 지배할 것”이라며 “건강한 비판은 좋지만, 아예 작품 제작 중단 등으로 이어지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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