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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못 배운 여자들 이야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등록 2021-03-27 09:25수정 2021-03-27 11:26

[토요판]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
⑥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의 한 장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의 한 장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노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목소리는 “조선 사회에서 한글은 ‘암글’이라고 불리었다. 여자들이나 쓸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었다”는 문장을 읽어낸다. 까만 화면 속 흰 글씨가 계속 깜박이며 틀린 글자로 타이핑되다가 다시 바르게 타이핑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목소리의 주인공이 매우 힘겹게 이 문장을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꽃나래 감독의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2019)은 글을 배우지 못한 여성들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전수받고 생산하는 일에서 배제되어온 여성들의 삶을 조망한다. 감독은 해외여행 중 식당 메뉴판 글을 읽을 수 없어 난감함을 몸으로 실감한 순간,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간판, 전철 노선도, 버스 안내판 등 일상 속의 많은 것들은 불편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감독은 할머니가 다니는 한글학교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여자가 배워서 무엇을 하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 까닭에 한글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여자이다. 다큐멘터리는 한글교실에서 글을 배우는 감독의 할머니(안치연)를 따라가면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정과 교육 현장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공부를 시작한 지는 벌써 몇년이 흘렀지만, 돌아서면 잊히고 돌아서면 잊힌다. 할머니의 시선으로 보이는 성경책은 기하학적인 무늬로 바뀐다. 그래도 할머니는 계속해서 배운다. 할머니가 존경스럽다는 이야기를 가족분들이 하는데도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인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배우는 할머니가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짠하게 느껴질 지점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배움에 대한 열정에 감탄을 하고 여성들의 배제된 기회에 분개하는 데서 감독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여성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상징체계로 끊임없이 기록을 해왔다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억과 경험을 몸에 새겨온 한글학교 여성들의 목소리는 자신들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한다. 몸에 새겨진 흔적은 죽고 못 살던 여자친구와의 인연, 남자친구와의 기억 등 우정과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떠올리며 회한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땐 그 표정 너머로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여성들은 배제되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몸에 새겨왔던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지식이나 상징체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이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졌으면 한다.

여전히 똑똑한 여자는 재수없다거나, 적당히 배우는 게 좋다든가 하는 말들이 남아 있는 사회일수록 더욱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겠다. 이야기가 많아지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우리 삶의 보이지 않았던 면면들이 새로 등장한다. 주변화된 사람일수록 사회의 불합리하고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낼 수 있다.

안치연씨도 일기를 쓸 수 있었다면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 쓰고 싶고, 책을 냈으면 몇수십권 내고, 영화도 찍었을 것이라고 한다. 감독은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카메라를 들려준다. 새로운 도구인 카메라를 든 안치연씨가 찍은 화면은 흔들린다. 하지만 할머니는 카메라를 진지하게 들고 있다. 안치연씨의 속 이야기가 더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영화감독

▶ 강유가람 감독은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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