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성리학과 바꾼 물고기 지식…근대성의 씨앗을 심다

등록 2021-03-22 16:10수정 2021-03-23 02:39

[31일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윤슬이 유난히 반짝이는 망망대해에 작은 목선이 점처럼 떠 있다. 흑백 스크린 속 저 멀리 보이는 섬의 산세는 한 폭의 수묵화다. 그림 같은 풍경이나, 며칠에 걸친 뱃멀미로 축 늘어진 선비는 이를 누릴 여유가 없다. 흑산도로 가는 길이 통한의 귀양길인 탓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설경구)은 동생 정약용(류승룡)과 함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정조 승하 뒤 왕위에 오른 순조 1년(1801)에 벌어진 신유박해로 두 형제는 각기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다.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을 위협하는 서학(천주교)을 섬겼다는 이유에서다.

스스로를 ‘역사 덕후’라 일컫는 이준익 감독이 신작 <자산어보>(31일 개봉)를 통해 조명하는 인물은 정약전이다. <왕의 남자>(2005)로 첫 천만 사극영화를 탄생시켰던 이 감독은 <사도> <동주> <박열>에 이어 또 한번 역사 속 인물을 끄집어냈다. “한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는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고 말하는 그는 윤동주 옆 송몽규, 박열 옆 후미코를 재조명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정약용보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은 정약전,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섬 청년 창대(변요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정약전은 역사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지만, 창대는 그렇지 않았다. 정약전의 저서 <자산어보>에 몇 차례 언급된 게 전부다. “섬 안에 창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은 탓에 식견을 넓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신실하고 정밀하여 물고기와 해초, 바닷새 등 모두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 지어 <자산어보>라 한다.” 이 감독은 <자산어보> 서문의 이 대목을 발판 삼아 창대의 서사를 펼쳐나갔다.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섬에 온 뒤 “아무리 해도 모르는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 물고기 공부”에 매진한다. 진정 백성을 위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 바다 생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창대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양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서자인 창대는 성리학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만이 백성을 위한 길이라 믿고 홀로 글공부를 한다. 이를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둘은 스승과 제자이자 벗이 된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책을 쓰는 정적인 행위를 담은 흑백 영화라 지루할 거라는 선입견은 던져버려도 된다. 정약전과 창대가 티격태격 주고받는 조선판 ‘티키타카’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정약전을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고 수발하며 남몰래 흠모하는 가거댁(이정은), 민생은 뒷전이고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해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흑산도 관리 별장(조우진), 창대만 만나면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욕지거리해대는 해녀 복례(민도희) 등이 감칠맛을 더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풍광과 정 많고 역동적인 섬사람들, 홍어·가오리·문어·짱뚱어·돗돔 등 퍼덕이는 물고기도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실제로는 흑산도가 촬영에 적합하지 않아 인근의 큰 섬 중에 당시 유배지와 비슷한 환경의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 감독은 <동주> 때처럼 이번에도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흑백을 선택했는데,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신공을 발휘했다. 그는 “흑백이 주는 장점은 선명성이다.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지닌 본질적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고 설명했다. 흑백이어서 더 운치 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영화의 딱 세 장면에 컬러 요소를 포인트처럼 넣었는데, 이 감독은 “나름 상징하는 바를 의도했으나, 관객이 각자 알아서 해석하면 좋겠다”며 말을 아꼈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가 말하는 건 단순히 실용 정신에 그치지 않는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관리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법도를 담은 <목민심서>를 쓰는 동안 정약전은 왜 물고기 책을 파고들었는지, 그 아래 깔린 사상에 주목한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양반도 상놈도, 서자도 적자도,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 감독은 “정약용이 성리학 테두리 안에서 실천적 행정가를 강조했다면, 정약전은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봤다. 그를 통해 근대성의 씨앗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약전의 생각을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창대라는 인물을 대비시켰다고 그는 설명했다. 창대는 정약전과 다른 길을 가다 뒤늦게 깨우침을 얻는다.

모든 인물의 연기가 빼어난데, 그중 사극에 처음 도전한 설경구의 연기가 빛난다. 이 감독은 “그의 얼굴에서 조선의 선비상을 봤기 때문”이라고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감독의 말마따나 설경구는 표정만으로도 세상이 필요로 하는 선비의 진심을 전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1.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일용 엄니’ 김수미…“엄마, 미안해” 통곡 속에 영면하다 2.

‘일용 엄니’ 김수미…“엄마, 미안해” 통곡 속에 영면하다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3.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4.

김수미가 그렸던 마지막…“헌화 뒤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

‘일용 엄니’ 배우 김수미 별세…향년 75 5.

‘일용 엄니’ 배우 김수미 별세…향년 75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