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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압박면접이라고요? 제 존엄을 잃어버렸는데요?

등록 2021-03-20 18:10수정 2021-03-20 21:13

[토요판] 밀레니얼 읽기
(8) 우리의 참담한 면접기

방송사 실무면접 보러 갔더니
“남자 많이 만나봤어요?” 이어
“남자한테 잘해요?” 점입가경
내 존엄을 건네주고 말았다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폭로
화나지만 너무 일반적인 모습
밀레니얼 경험 전 세대와 같아
‘유리바닥’ 뚫기도 쉽지 않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몇년 전 한 방송사의 실무면접에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남자 많이 만나봤어요?” 검정 뿔테의 면접관이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옆자리에는 인사팀 팀장이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여유로운 척 받아쳤다. “네! 만날 만큼 만나봤습니다!”

면접관은 이어 물었다. “남자한테 잘해요?” 그 순간, 손과 발이 싸늘하게 식었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웃음기를 애써 붙들었다. 순간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꼬였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싸워야 하나? 뭐라고 하지? 성희롱성 발언이니 자제해달라고 정색을 해야 하나? 판단은 빨라야 했다. 이건 압박면접일 뿐이라고 상황을 합리화했다. 입을 열어 최선을 다해 능글맞은 답을 내놨다. “제가 잘한다기보다는, 남자들이 저한테 잘하게 하죠.” 면접관은 만족한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던 인사팀장도 미소를 지었다. 면접장을 걸어 나오며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뉴욕 한복판에서 강도를 당한 주인공 캐리가 “뭐 더 잃어버린 것 없어요?”라고 묻는 경찰관에게 “제 존엄이요”(My dignity)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면접비 3만원을 받고 나온 그 면접장에서, 나는 다름 아닌 내 존엄을 그들에게 건네주고 나왔다. 취업만 시켜준다면 뭐 그쯤이야, 싶다가도 내 존엄이 아까워 이를 악물던 시절이었다.

동아제약이 쏘아올린 불씨

지난해 동아제약의 한 면접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 있었다. ‘여자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남자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당사자가 직접 입을 연 것이다. 동아제약은 성차별 의도가 없었다며 ‘불쾌감’을 준 것에 대해 유튜브 댓글을 통해 사과했다. 피해자는 개인 블로그에 세 건의 게시물을 올리며 동아제약의 공식적인 사과와 채용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시할 것을 요구했다.

세상은 시끄러웠다. 어떻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냐며 동아제약에 실망했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런 문장들엔 대체로 동의했으나, 동시에 의아하기도 했다. ‘왜 이제야?’ 몇십년 전부터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 아니었나 싶었다. 주변 친구들의 반응도 같았다. 계속 우리는 이런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게 마치 별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구는 반응이 도리어 낯설다고 했다. “면접 성차별 당한 적 있어? 얘기 좀 해봐.” “성차별 안 당해본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 사람도 있을까?” 이야기는 마술사의 입에서 연이어 나오는 색색의 손수건처럼이나 끊이질 않았다. 일반 기업에 지원하든, 방송사를 비롯한 언론사에 지원하든, 심지어 의사인 친구의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했던 작가 뮤리얼 루카이저의 말이 떠올랐다.

면접에서 나오는 어이없는 질문들

취업 준비 과정에서 성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친한 남자 동기가 있었는데 걔랑 나랑 같이 서류 10개 넣으면 나는 1~2개도 못 붙는데 걔는 8~9개 붙는 거야. 나는 경제학과고, 어학은 훨씬 더 뛰어나고, 인턴 경험도 있었는데 서류에서부터 걸리는 거야.”(29살 문○원) “언론사 필기에서는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이 붙는데 최종 합격하는 사람 수 보면 결국 여자 남자 수 비슷하거나 남자가 더 많아.”(32살 서○현)

2019년 기준 유리천장지수가 오이시디(OECD) 29개 회원국 중 꼴찌를 차지한 나라답게, 천장은커녕 바닥에 진입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현실임을 여성들은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면접에 가서 듣고 나온 질문도 동아제약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비씨카드 최종 면접 갔는데 가족관계 쓴 부분 짚으면서 ‘왜 가족관계에 엄마를 먼저 썼어요?’라고 묻더라고요.”(28살 김○지)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업무와 상관없는 질문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27살 때 본 대학교 교직원 면접에서는 ‘결혼 언제 할 거냐, 남자친구 있냐, 또 금방 결혼하고 애 낳을 거 아니냐’ 같은 질문만 잔뜩 하더라. 대학교 교직원 면접을 다섯 군데 넘게 봤는데 거기에서 다 들은 이야기야.”(30살 김○희) 언뜻 들으면 지원자보다도 지원자의 경력단절을 더 걱정해주는 것 같다. 지원자를 앞에 두고 모욕하는 발언도 예사다. “24살 졸업 전에 본 면접에서는 나 앉혀놓고 여자들은 일만 배우고 퇴사하기 바쁘다고 하더라. 끈기 없고 이기적인 애라고 욕했어.”(30살 김○희)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의 ‘서울시 여성의 경력단절 실태 및 정책 수요조사’(2019) 결과를 보면, 경력단절 여성들이 일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임신, 출산’(13.7%)이 아니다. 두배 넘는 여성들(27.5%)이 ‘낮은 임금이나 긴 근로시간, 계약 기간 만료’ 등의 근로조건을 경력단절의 이유로 꼽았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에게도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면접관으로 앉아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낡고 성긴 구세대의 것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세상은 그대로인 것 같다

밀레니얼들이 경험하는 세상도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밀레니얼을 채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밀레니얼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아직은, 199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들도 1970년대에 태어난 이전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에서 산다. 달라진 게 있다면 소셜미디어라는 공간이 생겼고, 적어도 그곳에서는 약간의 발언권을 갖게 된 이들이 많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여성들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입을 떼기 시작했다는 것.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아이엠에프(IMF) 총재는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을 줄여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끌어올리면 고령화에 따른 부작용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여성의 노동 참여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국내총생산(GDP)을 10%포인트 높일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여성을 차별하는 비경제적인 일은 오늘도 한국 사회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평균 28.4살에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이 다시 일자리를 얻기까지는 7.8년이 걸린다. 이때 받는 임금은 단절 전 임금의 87.6% 수준이다.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의 경우에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2020년 우리나라는 153개국 중에서 108위를 차지했는데, 그중 ‘유사 업무의 성별 임금 격차’의 경우엔 119위를 기록했다.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변한다고 믿고 싶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요즘 사람을 뽑고 있다. 뉴닉의 채용공고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젠더, 성정체성, 나이, 학력이 어떻든 상관없어요.(고슴도치도 일하는 회사잖아요.)”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이 정해져 있다. 연락 가능한 이름과 연락처는 묻지만 성별은 묻지 않는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묻지 않는다. 머리 길이가 어떤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묻지 않는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어 회사 안을 둘러보면 모두가 제각기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드디어 안전지대에 당도했다는 기분이 들면, 가끔은 울컥한다. 이제는 이를 악물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으니까.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고 분석된다.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면서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떼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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