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는 울었지만 나는 (멍해져서) 울지 않았다. (자가격리로) 매니저와 둘이서만 자축하려 하는데, 매니저는 술을 못 해서 나 혼자 마셔야겠다. 매니저는 내가 술 마시는 걸 구경만 할 거다.”
윤여정답게 솔직하고 유쾌한 소감이다. 그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티브이(TV)플러스 드라마 <파친코> 촬영차 방문한 캐나다에서 15일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시간 만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이런 소감을 남겼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윤여정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말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웃게 만든다. 과거엔 다소 까칠하고 도회적인 이미지가 강했지만, 나영석 피디의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을 통해 정감 있고 유머 넘치는 면모가 알려지면서 젊은층에도 친숙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런 참모습을 일찍이 알아본 이들이 영화감독이다. 이재용 감독은 2008년 윤여정을 처음 만났다. 이 감독은 “개인적으로 팬이었는데, 실제 만나보니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그분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세월과 연륜에서 나오는 촌철살인 유머가 흥미로웠어요. 이런 매력을 사람들과 나눠야겠다 해서 기획한 영화가 <여배우들>(2009)이었죠.” 세대별 여성 배우 6명이 모여 명확한 대본 없이 즉흥 연기를 펼치는 페이크 다큐는 윤여정에게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하지만 흔쾌히 수락했고 즐겁게 작업했다.
윤여정의 도전정신은 일찌감치 빛났다. 임상수 감독은 <바람난 가족>(2003)의 바람난 시어머니 역에 윤여정을 캐스팅했다. “다른 배우들은 ‘캐릭터가 너무 세다’며 거절했지만, 윤 선생님은 ‘재밌을 것 같다’며 수락하셨어요. 이후 <하녀> <돈의 맛> 등 파격적인 작품도 선뜻 출연하셨죠. 저는 그분을 ‘젊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것, 안 해봤던 것, 잘 알지 못해도 감독을 믿고 가보는 것에 대한 모험정신이 살아 있거든요.”
촬영장에서도 그는 상대를 배려하고 유머를 잃지 않는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 등을 함께한 박성수 전 문화방송 피디는 “상대 연기에 따라 유연하게 리액션함으로써 상대 배우를 살아 있게 만든다”고 말했다. 영화 <장수상회>(2015)를 함께 작업한 강제규 감독도 “대선배님이시다 보니 저나 스태프들이 부담 갖고 긴장했는데, 농담도 하고 먹을 걸 싸와 나눠주며 편안하게 해주셨다. 후배 연기자가 늦거나 실수할 땐 따끔하게 꾸짖기도 하지만, 뒤끝 없이 툭 털어낸다”고 전했다.
1980년대 중반 가수 조영남과 이혼한 뒤 생계를 위해 연기를 다시 시작한 윤여정은 훗날 인터뷰에서 “살아가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 아이를 키워내야 해 말도 안 되게 죽는 역할, 막장극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자식 키우는 일에서 해방된 60살 이후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작품만 골라 출연하고 있다. 임상수, 이재용, 홍상수 등 한번 인연을 맺은 감독과 계속 작업하는 경향이 짙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노인을 상대로 성을 파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한 것도 그래서다. 이 감독은 평소 윤여정과 대화를 나누며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곱씹으며 영화를 구상했다. 파격적인 주제에다 저예산 영화여서 망설일 법도 했지만, 윤여정은 감독을 믿고 또 한번 도전에 나섰다. 그 결과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성과를 이뤘다.
“60살 넘으면서부터 웃고 살기로 했어. 전에는 생계형 배우여서 작품을 고를 수 없었는데, 이젠 좋아하는 사람들 영화에는 돈 안 줘도 출연해.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는 게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야.” 윤여정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의 김초희 감독에게 해줬다는 말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프로듀서로 처음 윤여정과 인연을 맺은 김 감독은 “처음엔 서먹했다가 선생님께 밥을 해드리고 함께 식사하면서 가까워졌다. 내가 영화를 그만두려 할 때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셨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김 감독의 단편 <산나물 처녀>(2016)에 이어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에도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찬란 제공
윤여정의 이런 태도는 <미나리>로 이어졌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인아 프로듀서의 소개로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의 진심을 느끼고는 열악한 환경인 줄 알면서도 흔쾌히 출연을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예상도 못 한 오스카 후보 지명을 받았다. 윤여정은 16일 소속사를 통해 이런 소감을 전했다. “교포 2세들이 만드는 작은 영화에 힘들지만 보람 있게 참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쁜 순간을 맞이하게 됐네요. 영화 시나리오를 전해주고 감독을 소개해주고 책임감으로 오늘까지도 함께해주는 제 친구 이인아 피디에게 감사합니다.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감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유가 없을 땐 원망을 하게 되지요. 제가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지나온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네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