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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프레디 머큐리 지워버린 SBS의 프레디 머큐리 영화

등록 2021-02-26 19:26수정 2021-02-27 15:24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보헤미안 랩소디’ 편집 논란

설날 특선 ‘보헤미안 랩소디’ 편성
‘감동의 영화’ 대대적 홍보 했지만
동성 키스 장면 등 싹둑 가위질해
‘15세 관람가’여서 편집했다 해명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지만
이성 키스, 여성 노출은 그대로 방영
삶의 주요 축 범성애자 정체성 실종
민망한 편집으로 성소수자들 모욕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열창하는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열창하는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잠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일본의 한 방송사에서 골든위크 연휴를 맞이해 방영할 작품으로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2004)의 방영권을 수입했는데, 스모 선수 시절의 역도산(설경구)이 조선인이라서 차별당하는 장면이나, 친구 김명길(박철민)의 집에 가서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말을 쓰는 장면을 죄다 편집해서 방영했다고 상상해보자. 역도산의 굴곡진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인’이라는 요소를 싹 다 빼버리고 방영한 이유를 묻자, 방송사 쪽에서 “인종차별의 의도는 없었으나, 전후 일본의 영웅이 조선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불편해하는 의식이 있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말한다면, 납득이 갈까? 아마도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영화를 방영하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되묻게 되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이건 그저 상상일 뿐이다. 딱히 다행인 일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일은 훨씬 더 참담하고 민망하니까. 에스비에스(SBS)는 설 연휴였던 2월13일 저녁 8시40분, 영국 록밴드 퀸의 리드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를 편성해 방영했다. 국내 개봉 당시 994만명 관객 동원이라는 대기록과 함께 ‘떼창’이 가능한 ‘싱얼롱’ 상영관을 따로 운영할 만큼 인기 있었던 대작이라 에스비에스 또한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에스비에스는 방영 2주 전에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보헤미안 랩소디’ 전설의 록밴드 퀸의 귀환”이란 제목의 예고편을, 방영 1주 전에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감동을 다시 한번 싱얼롱 버전으로!”라는 제목의 예고편을 공개하며 홍보에 최선을 다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객들 또한 티브이를 통해 <보헤미안 랩소디>를 다시 만난다는 설렘으로 2월13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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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싱어 ‘삶’ 삭제한 편집

그리고, 일이 터졌다. 에스비에스는 프레디 머큐리의 성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 그러니까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이나 게이바에 들어가는 장면은 죄다 삭제했고, 뮌헨 파티 장면에서 배경에 걸리는 남성들 간의 키스는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모욕감을 느낀 이들이 항의하자 에스비에스 관계자는 “동성애에 ‘반대’할 의도는 없었”으나, 지상파 방송사에서 가족 동반 시청률이 가장 높은 저녁 시간대에 15세 관람가로 방영된 만큼 신체 접촉 시간이 긴 장면은 편집했노라고 밝혔다. (‘‘보헤미안 랩소디’ 동성 키스신 삭제 SBS 해명 따져보니’, <미디어오늘> 2021년 2월15일. 김예리 기자) 아무래도 인터뷰에 응한 관계자가 회사의 전력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다. 에스비에스는 <아내의 유혹>(2008~2009)을 온 가족이 보는 저녁 7시20분에 15세 관람가로 방영해도 된다고 판단했고, 지금도 <펜트하우스>를 15세 관람가로 방영 중인 방송사인데, 고작 남자들끼리 키스하는 정도가 저녁 시간 15세 관람가 등급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니.

&lt;보헤미안 랩소디&gt;에서 프레디 머큐리(왼쪽)와 매니저 폴 프렌터(앨런 리치)가 키스하는 장면. 화면 갈무리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왼쪽)와 매니저 폴 프렌터(앨런 리치)가 키스하는 장면. 화면 갈무리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게다. 에스비에스는 프레디 머큐리가 메리 오스틴(루시 보인턴)과 키스하는 장면이나, 로저 테일러(벤 하디)가 양팔에 두 여성을 껴안고 미국 투어 버스 뒷자리에서 자고 있는 장면,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실내 자전거를 타는 장면 등은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송출했으니까. ‘신체 접촉 시간이 긴 장면’이란 기준으로 보면 메리 오스틴과 키스하는 장면이 더 길고, 신체 노출의 정도를 놓고 보면 로저 테일러의 품에 안겨 있던 여성들이나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던 여성들의 옷차림이 더 심하다. 그러니까 이성 간의 신체 접촉이나 노출은 온 가족이 봐도 괜찮은데, 남자끼리 키스하는 건 보여줘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앞서 인용한 <미디어오늘> 기사에 따르면, 관계자는 “동성 간 키스 장면을 불편해하는 의식이 사회에 깔려 있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11년 전 일부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에도 “우리도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시대가 변했다”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10) 속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 커플의 연애담을 이어가던 에스비에스는, 11년이 지난 지금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며 필름에 가위질을 한다. 확고한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라. 어째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기회주의’의 사전적 정의 그대로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충실하게 다룬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양성애자로 살아온 삶을 성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라고 말하기엔 영화의 논조가 갈지자를 그리는 작품이지만, 적어도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의 성 정체성을 작품의 중요한 축으로 삼은 작품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 머큐리를 “부적응자들을 위해 노래한 부적응자”로 묘사한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헤맸던 잔지바르 출신 파르시(페르시아에서 인도로 이주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의 후손) 청년,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퍼포머….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의 성 정체성은 기성의 벽을 정면으로 도전한 ‘아웃사이더’로서의 그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이분법적 젠더 규범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그 규범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화려한 의상과 말투,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세상을 사로잡은 아이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했던 범성애자. 그러니까 에스비에스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도려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영화를 방영하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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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면 왜 방영했나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서 퀴어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장면들은 지우고 나머지만 취하고 나니 그림이 심하게 민망해진다. 설 명절을 맞이해 프레디 머큐리가 제 인생을 녹여낸 노래들로 시청률은 높이고 싶으니 ‘싱얼롱’ 하면서 보라며 후반 20분간은 영어 가사 자막까지 입혀서 방영했지만, 동성 키스신을 내보냈다가 혐오 세력의 항의를 받을 것은 두렵고 피곤한 일이니 노래 속에 녹아든 인생은 걸러서 내보내겠다는 사고의 흐름은 노골적으로 읽힌다. 그 결과는 닐슨 전국 기준 시청률 6.3%, 설 연휴에 방영된 특선 영화 중 1위였다. 설 대목 장사 잘 끝났으니 나머지 문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까?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공식적인 문제제기에도, 퀸의 객원 보컬 애덤 램버트의 항의에도, 에스비에스는 아직 별다른 사과의 말이 없다. 하긴, 명색이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나온 거물급 정치인들조차 대부분이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확답을 피하고 얼버무리거나, “안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며 시내 중심부는 피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망발을 일삼고 있는데, 굳이 에스비에스가 먼저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방송사 입장에서야 그저 혐오 세력과의 충돌이라는 피곤한 일을 피하기 위한, 별 뜻 없는 조치였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양복을 차려입고 출석해야 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 또한 크겠지. 편하게 집에서 티브이 보고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이 실무자들의 고충을 다 알진 못할 것이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졸지에 사랑하는 사람과 입을 맞추는 일을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선 보기 불편한 장면’ 취급당하며 그 존재가 지워지고 부정당한 성소수자 동료 시민들이 느꼈을 모욕과 스트레스보다 더 크진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명절 특선 영화부터 서울시장 예비후보들까지 앞장서서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동안, 성소수자 극작가 한분과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한분이 세상을 떠났다. 침묵과 배제를 강요하는 공기 속에서 동료 시민들이 질식해 쓰러져가는 걸 애도하느라 바빠서, 그만 방심위에 호출될 걸 걱정하는 방송사 실무자들의 크나큰 고충을 몰라 뵈었다. 비아냥이 너무 심한가? 아픈가? 이 글이 그렇게 아프면, 존재 자체가 지워진 이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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