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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물방울 하나로 ‘완전한 원’ 이룬 예술가의 삶이었습니다”

등록 2021-01-12 19:39수정 2022-03-17 12:07

[가신이의 발자취] 스승 김창열 선생님을 기리며
김창열은 1973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물방울’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전시장인 ‘놀 인터내셔널 프랑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김창열은 1973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물방울’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전시장인 ‘놀 인터내셔널 프랑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1987년 늦여름 프랑스 파리의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듣던 선배의 귀띔으로 김창열 선생님을 찾아갔다. 내가 그리던 그림을 보여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조수 자리를 제안하셨다. 그때부터 5년 동안 파리의 작업실에서 선생님을 도우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당대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사상가들에 대한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연극, 음악, 건축 등에 있어 가장 수준 높은 사례들을 수시로 접할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과 호기심은 나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선생님은 평생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실에서 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물론이고 자신을 방문하는 수많은 한국, 미국, 일본의 지인들을 만날 때만 빼고는 거의 매일 저녁 전시나 공연·영화·연주회 등을 보러 외출했다. 선생님만큼 동시대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많이 관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로버트 윌슨이나 피나 바우슈 등 거장들의 공연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김창열 선생님은 한국의 현대미술이 처음 세계적인 무대로 나아가던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다.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친구인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정상화 작가와 더불어 비정형이라는 의미의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을 통해 한국 화단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 시기에 훌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한 뒤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1966년부터 3년간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귀국 대신 현지에 정착했다. 그때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지내며 작업하다 ‘물방울 그림’의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러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해마다 5월 열리는 전위미술 전시회인 ‘살롱 드 메’에 1972년 출품한 첫번째 물방울 작품 ‘이벤트 오브 나이트’로 국제 화단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또 1970년 마구간 시절 부인 마르틴느 질롱을 만난 이후 2019년 귀국해 서울 평창동에 둥지를 틀 때까지 50여년 동안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 가교 노릇을 했다.

1970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작업하던 초기 김창열(오른쪽)은 부인 마르틴 질롱(왼쪽)을 만나 평생 회로했다. 이후 노트르담 거리의 자택은 2009년 완전 귀국할 때까지 ‘한국인 사랑방’ 구실을 했다. 사진은 1979년 잡지 <주간여성>에 실린 부부의 모습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1970년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작업하던 초기 김창열(오른쪽)은 부인 마르틴 질롱(왼쪽)을 만나 평생 회로했다. 이후 노트르담 거리의 자택은 2009년 완전 귀국할 때까지 ‘한국인 사랑방’ 구실을 했다. 사진은 1979년 잡지 <주간여성>에 실린 부부의 모습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1987년 우연히 파리 자택 방문해 ‘인연’
그림 보더니 즉석에서 ‘조수’ 제안
5년간 작업 도우며 수많은 대화

노트르담 근처 자택 ‘한국인 사랑방’
백남준·이우환 등 명사들 어울려
명절 때마다 유학생들 초대해 대접

김창열(오른쪽)은 1969년 파리 정착을 주선해준 백남준(왼쪽)과 평생토록 예술적 동지이자 절친으로 교유했다. 1984년 12월 파리에서 함께 잡지 &lt;공간&gt;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김창열(오른쪽)은 1969년 파리 정착을 주선해준 백남준(왼쪽)과 평생토록 예술적 동지이자 절친으로 교유했다. 1984년 12월 파리에서 함께 잡지 <공간>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파리 6구에 있는 노트르담-데-샹 거리 44번지, 김창열 선생님의 자택에는 백남준·이경성·이우환 같은 명사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지금도 백남준·이우환 두 분이 함께 와서 식사했던 저녁을 잊을 수가 없다. 모두 세계적인 작가지만, 타국에서 어려운 시대를 함께 겪어온 동지라는 끈끈한 우정과 서로에 대한 존경심, 애국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90년대에 파리를 방문한 한국 인사들 가운데 함께 식사를 안 해 본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선생님 댁은 파리의 한국인 사랑방 구실을 했다. 명절 때마다 젊은 유학생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던 일도 잘 알려져 있다. 위대한 화업 못지 않게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움과 친절함은 고인에 대한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물방울’은 그의 삶을 요약하는 단어다. 덧없으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소리 없이 맺히면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이루는 이 미미한 존재 안에 김창열의 삶이 함축돼 있다. ‘물방울 그림’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본 그림 중 하나다. 미국 미술로 치자면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작가가 보여준 겸손함과 경청의 미덕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는 온갖 변화를 요구받지만 삶이 지나가고 나면 하나의 기억으로 남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예술가의 삶이 완전한 원을 이루었다.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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