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아내>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지난 21일부터 열리고 있는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스파이의 아내>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룬 일본 영화다. 요즘 일본 영화계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소재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전쟁범죄를 숨기기에 급급하고 피해국에 공식 사과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을 법하다. 하지만 영화를 연출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26일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더한 영화일 뿐, 엄청난 각오나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며 “다만 이런 이야기가 현재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판단하는 건 관객의 몫”이라고 말했다.
<스파이의 아내>는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을 배경으로 한다. 무역회사 대표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는 만주에 출장 갔다가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 전쟁범죄의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유사쿠는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결심하지만,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는 가정이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남편을 말린다. 한동안 내적 갈등을 겪던 사토코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몸소 행동에 나선다.
구로사와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함께 현재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대표 감독이다. 공포, 스릴러 등 장르영화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7년 <큐어>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이후 칸국제영화제에 단골로 초청됐다. 칸에서 <회로>(2001)로 국제비평가연맹상, <도쿄 소나타>(2008)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 <해안가로의 여행>(2015)으로 같은 부문 감독상을 받았다.
<스파이의 아내>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감독의 첫 시대극이다. 다만 일본의 전쟁범죄 자체를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를 어떻게 폭로할 것인가를 두고 부부가 겪게 되는 일을 서스펜스 스릴러와 멜로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구로사와 감독은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시대를 잘 마주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오락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양심적인 목소리로 봐도 되겠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저로선 기쁜 일이지만, 뭔가 은폐된 일을 드러내는 작업을 새로 한 건 아니다”라며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성실하게 그리고자 했을 뿐”이라고 몸을 낮췄다.
<스파이의 아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신념을 가진 남편이 아니라 그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를 두고 구로사와 감독은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 아내의 시선을 통해 당시 보통의 일본인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파이의 아내>는 지난 6월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에서 드라마(단막극)로 방송한 데 이어, 지난 16일 일본 극장에서도 개봉했다. 일본 내 반응을 묻자 그는 “드라마는 8K 디지털 고화질 버전으로 방송했기 때문에 해당 수상기가 드문 일반 가정집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번에 극장 개봉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보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반면, 국제사회에서는 크게 주목받고 있다. <스파이의 아내>는 지난달 열린 제77회 베네치아(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인 감독상을 받았다. 그는 “큰 상 수상이 처음이라 매우 기뻤다. 감독상이지만 영화에 참여한 모두에게 주는 상으로 받아들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다만 현지에 직접 가지 못해 실감을 못 했다. 내가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 심사위원장에게서 직접 트로피를 받았다면 얼마나 흥분했을까”라며 아쉬움도 나타냈다.
<스파이의 아내>는 곧 국내에서도 개봉할 예정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전쟁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연결 지점을 한국 관객도 자유롭게 판단하면 좋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