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중심 뮤지컬, 창작 초연의 힘, 그리고 김선영의 존재감. 이 세가지 ‘희망’을 보여준 뮤지컬 <호프>가 11월 다시 찾아온다. 다시 70대 노파 호프를 연기하는 김선영을 지난 8일 서울 종로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HOPE’(호프): ‘희망’
지난해 이 단어가 공연계를 달궜다. 초연한 창작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 드물게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단숨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객석 점유율 95.8%,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등 8관왕. <호프>는 70대 노파인 에바 호프가 현대문학 거장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 소유권을 두고 이스라엘 국립도서관과 송사를 벌이는 이야기로 법정이 주 무대다. 초연에서 호프를 연기했던 김선영은 “사람이 살면서 힘들고 불안할 때 무엇에 의지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각박하고 불안한 시대에 78살 노파의 인생이 우리를 위로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창작 뮤지컬인데다 여성이 끌고 가는 작품이 큰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도 <호프>는 남성 배우 중심의 공연계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여러 배우가 등장하지만 호프의 회상이 주를 이뤄 여성 캐릭터의 모노드라마 같은 느낌이다. 이 작품에서 호프를 연기한 김선영은 올해 데뷔 21년이 됐다. <호프>에서 김선영은 진짜 배우가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무대 위 여성 배우의 존재감을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70대 노파의 모습을 한, ‘예쁨’을 버린 분장에 목소리 연기, 퇴장이 거의 없는 분량을 견디는 힘까지 어느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호프>로 그는 13년 만에 지난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여자주연상을 받았다. “그동안 뮤지컬에서 여성의 역할이 제한돼 있었는데 ‘호프’ 같은 캐릭터는 전무후무했어요. 연기에 대한 갈증을 원 없이 풀어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도전했고, 실제로 무대에서 그런 경험을 했어요. 여성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다채로워졌으면 좋겠어요.”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최근 연극·뮤지컬계 여성 배우의 위상이 높아진 데는 김선영과 최정원 등이 꾸준히 제자리를 지켜온 힘이 크다. <리지>처럼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뮤지컬이 등장해 사랑받았고, 그동안 남성들이 맡았던 역할의 성별을 없앤 ‘젠더프리’ 시도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선영은 “40대 후반인 내가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선영은 1999년 데뷔작 <페임>으로 신인상을 받았고, 이후 <지킬 앤 하이드> <미스 사이공> <위키드> <에비타> <잃어버린 얼굴 1895> 등 굵직한 작품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뮤지컬의 여왕’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남성 배우 중심이었던 시장에서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그도 서서히 주변 인물을 맡게 됐다. 최근 <제이미>에서는 제이미의 엄마로도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욕심내지 않고, 해야 하는 배역과 할 수 있는 배역을 구분하며,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노파 역할도 좀 더 어렸더라면 기피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역할은 아무리 기회가 있어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내 욕심만으로 역할을 맡는 건 여성 배우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대신 그는 부족한 점을 찾아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배역에 도전한다. “일단 부딪쳐보는 성격”이라는 그는 늘 새로운 작품을 찾아 헤맨다. “이미 한 작품을 또 하는 게 배우로서는 안정적일 수 있지만 도전하는 정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휘트니 휴스턴의 어려운 곡을 내내 불러야 했던 <보디가드>에 처음 출연했던 것도 그런 연장선이다. <호프> 역시 마찬가지다. 회상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눈빛, 표정, 몸으로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해내야 한다. 성별 구분을 떠나 누구라도 도전하기 쉽지 않은 역이다. 그는 “공연을 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만족을 못 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요. 매일 생방송을 하며 살았기에 늘 긴장하며 나를 채찍질했죠. 그게 힘들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요. 공연을 위해 사는 거죠.”
데뷔 21년이 된 지금, 더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깊다. 그는 “내가 열심히 공연하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때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주려고 교수직을 맡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호프>에 출연한 것은 그런 희망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호프>는 여러가지 면에서 공연계에, 여성 배우들에게 희망을 준 작품이에요.”
그 ‘희망’으로 가득 찼던 <호프>가 다시 돌아온다. 11월19일부터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다시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