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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걸그룹 성공 확률 0.001%의 그늘 걷어내려면

등록 2020-10-17 11:06수정 2020-10-17 11:2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예능 <미쓰백>이 던진 화두

아이돌 ‘다시 일어서기’ 예능 화제
상처 안고 사라진 걸그룹 멤버들에게
인생곡 줘 재기 발판 제공한단 취지

연내 데뷔하는 걸그룹만 60~70팀
케이팝에 대한 장밋빛 전망 넘어
인권과 존엄 보장되는 산업으로
가꿔가는 고민과 논의 이어져야
엠비엔(MBN) 예능 &lt;미쓰백&gt;은 상처를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진 아이돌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 그들은 이제 웃을 수 있을까. 엠비엔 제공
엠비엔(MBN) 예능 <미쓰백>은 상처를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진 아이돌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 그들은 이제 웃을 수 있을까. 엠비엔 제공

나인뮤지스 출신 세라는 공황장애로 숨을 몰아쉬며 연신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린다. 스텔라 출신 가영은 노출 콘셉트가 남겼던 상처 때문에 더운 날씨에도 긴팔 상의와 긴바지를 고집한다. 한국에서 여자 아이돌로 사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엠비엔(MBN)이 새로 선보인 예능 <미쓰백>은 여러모로 착잡하다. ‘상처만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진 걸그룹 멤버’들에게 다시 일어서기 위한 조언과 코칭을 제공하고, 그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만한 ‘인생곡’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은 <미쓰백>은 방영 2회 만에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방영 전에는 애프터스쿨 출신 레이나처럼 대중적인 인지도를 많이 쌓은 멤버들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기회를 못 얻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취지와는 다르지 않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방영 뒤엔 애프터스쿨로 전성기를 누렸던 레이나 같은 사람조차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공감대가 더 크게 퍼지고 있다.

<미쓰백>에서 언급된 것처럼, 1년에 데뷔하는 걸그룹은 그 수만 세어도 족히 60~70팀에 이른다. 그중 다음 곡을 발표하는 데 성공하는 팀은 극히 소수이고, 연습생으로 보낸 기간만큼이라도 활동하는 데 성공하는 팀은 더더욱 소수다. 이름도 외울 틈 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그룹이 부지기수이고, ‘연습생’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중엔 그렇게 데뷔 아닌 데뷔를 했다가 다시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간 경우도 적지 않다. 케이팝 산업은 겉으로만 보면 더없이 화려한 산업이지만, 그 안에서 정산을 제대로 받은 이들과 최저시급 이상의 수익을 거두는 이들의 수를 셈하면 가장 열악한 산업이기도 하다. ‘걸그룹 성공 확률 0.001%’라는 프로그램의 설명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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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화려하면서도 더없이 열악한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리고 활동 기간이 남긴 상처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인생곡’을 선물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다는 <미쓰백>의 취지는 아름답다. 앞서 비슷한 콘셉트로 제작되었던 여타 프로그램들이 경쟁을 통해 ‘인생곡’을 받을 사람을 추려내는 서바이벌 방식을 택했던 것과 달리, <미쓰백>은 여덟명 모두에게 각기 다른 곡을 선물해준다는 점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도 되는 걸까?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미팅을 한 가수만 200여명에 이른다는데, 그중 <미쓰백>이 도와줄 수 있는 가수는 여덟명뿐이다.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둬 다음 시즌이 제작된다 해도, <미쓰백>의 제작진이 선의를 가지고 가수를 도와주는 속도보다 새로운 걸그룹이 데뷔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시청자들이 <미쓰백>을 보며 감동을 받는 동안에도, 또 누군가는 가망이 없는 내일 속으로 돌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필수재가 아니라 취향과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비필수적인 사치재이기에, 소비자의 수요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취향이 선택을 받게 될지 짐작하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더 많이 유입되어 더 다양한 시도를 해야, 그중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사람을 발견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확률도 높아진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력이 유입된 탓에 국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지다 보니 케이팝 산업은 갈수록 성공 확률이 희박한 도박이 되어가고 있다. 해외 시장을 공략해볼 여력이 없는 이들은 성공을 거두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종사하는 이들의 인권이 얼마나 잘 보장되고 있는지를 살피기가 어려워진 산업이 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과열경쟁을 막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를 도입하는 방법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쿼터를 걸어서 한해에 데뷔할 수 있는 그룹의 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시장의 공급을 조절하고, 연습생과 소속 가수를 무리 없이 지원해줄 수 있는 물적 토대가 갖춰진 기획사에만 제한적으로 등록을 허가해줌으로써 연습생들이나 소속 가수들이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받으며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작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초안을 발표하고 9월 완성해 공개한 연습생 표준전속계약서가 업계 전체에 도입된다면 그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아직은 도입을 권고할 뿐 강제하고 있지는 않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유인책에도, 연습생 표준전속계약서는 아직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진 못했다.

산업에 유입되는 인력의 양을 조금씩 통제해 경쟁을 줄이는 일만큼이나, 연습생이나 가수들처럼 이미 산업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인권을 보장받으면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큰 지장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산업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도 중요하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케이팝 산업 붐을 타고 소위 ‘아레나’로 불리는 대형 공연장을 경쟁적으로 건설하는 행보를 걷고 있지만, 아레나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성공한 가수들은 그 수가 적기에 그 과실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존에 존재하는 소규모 라이브클럽들이나 소극장 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케이팝 종사자들이 크고 작은 공연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려면 문화체육관광부나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유관 부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그리고 연습생과 가수 등의 산업 종사자들이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케이팝 산업이 갈 길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가는 일이 필수적이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거둔 성과를 두고 장밋빛 전망으로만 가득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이 더는 죽거나 다치거나 자신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말이다. 그래야만 기획사들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고, 그를 통해 이 산업을 좀 더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만들 수 있다.

당연히 <미쓰백>이 이처럼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무거운 짐을 홀로 오롯이 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티브이 프로그램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고, 참여하는 여덟명의 가수에게 모두 인생곡을 선사해 상처를 치유해주고 다시 일어나 도전해볼 용기를 주는 일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다만 <미쓰백>을 보면서 함께 서글퍼하고 감동을 받았던 시청자들에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을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장밋빛 전망으로만 가득한 케이팝 산업에도 어두운 이면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더욱 책임감 있는 자세로 종사자들의 인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유관 부처에 좀 더 섬세한 감독을 요구하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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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밖에서 해야 할 일

누군가는 그저 티브이를 보는 시청자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내 ‘최애’ 챙기는 것도 바빠 죽을 마당에 그런 중차대한 일들을 해야 한다니, 당장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막연한 게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꾸준히 변화를 만들어온 바 있다.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의 ‘노예계약’ 문제가 불거져 나온 이후 2009년 연예인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것에는, 일개 시청자와 팬에 불과했던 이들의 꾸준하고 조직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 연습생 표준전속계약서가 도입된 것 또한 이처럼 꾸준히 문제를 제기한 이들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연예기획사들에 연습생 표준전속계약서 채택을 요구하는 일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아레나’를 짓는 데에만 집중하지 말고 좀 더 많은 이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산업육성책을 고민할 것을 촉구하는 일도, 결국은 <미쓰백>을 화두 삼아 대화를 이어나갈 우리의 손에 달린 게 아닐까?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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