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프랑스 문화원에서 영상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단체 영상실과 디브이디·비디오 자료실(사진)이다.
우선 프랑스문화원 세대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주어야 한다. 노무현 시대의 영화광은 전두환 시대의 영화광과 무엇이 다를까? 혹은 노태우 시대의 영화광은 박정희 시대의 영화광과 무엇이 다를까? 나와 함께 프랑스문화원의 지하 일층에 있던 ‘살 르느와르(Salle Renoir)’에서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사랑했던 세대들에게는 프랑스문화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프랑스문화원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관총부대’ 만난뒤 등교 시작 나는 한국에서 가장 참혹한 십대를 보낸 영화광 세대에 속한다. 박정희는 외환 보유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1971년 외화 수입을 영화사에 연간 한 편(!)을 허가하였다. 그런 다음 입맛에 맞는 새마을 영화, 반공 영화, 문예 영화를 만들면 추가로 외화 한 편의 수입권을 주겠다고 허용하였다. 한국 영화는 검열로 거의 만신창이 되고 있었다. 아직 세상에는 인터넷이 없었고, 디브이디(는커녕 비디오 테이프)도 없었고, <씨네21>도 없었고, 부산영화제도 없었다. 그건 모두 20년 뒤의 일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관에 가든지, 아니면 텔레비전에서 주말의 명화를 기다리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 우울한 고등학교 1학년 소년. 그해 가을, 나는 우연히 신문에 손바닥 만하게 실린 기사를 보았다. 거기서 늘 라디오만 틀면 (<친절한 금자씨>의 해설을 하던 바로 그) 김세원씨의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던 기타 독주곡 ‘로망스’가 담긴 <금지된 장난>을 프랑스문화원이라는 곳에서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고 정영일 선생(영화평론가)은 라디오에만 나오면 <금지된 장난>과 <길>이 영화사상 가장 슬픈 영화인 것처럼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어서 죽을 만큼’ 애타게 그리워했었다. 있는 용기를 다 내어서 경복궁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문화원에 처음 갔다. 그런데 그날 상영한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기관총부대>였다. 고등학교 1학년 소년이 고다르가 누군지 알 리가 없었고, 아직 시절은 1975년이었다. 이 기괴한 영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영화, 그러나 무언가 굉장한 걸 보았다는 쇼크를 안겨준 영화, 나는 그날 <금지된 장난>과 작별하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프랑스문화원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르누아르, 1930년대 시적 리얼리즘, 브레송, 따티, 오필스, 사샤 기트리, 장 콕토, (프랑스의) 부뉴엘, 전후 심리적 리얼리즘, 그리고 물론 누벨바그 영화들을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필름으로 보았다. 여기서 방점은 ‘아무런’에 있다. 알제리 영화도 보았고, 아프리카 영화도 처음 보았다. 그때 사실 나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공간과 시간에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나침반도 없이, 등대도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아직 살아 있던 그 황량한 세상에서 보낸 나의 십대는 지하실의 살 르누아르에서 보낸 한 철이었다. 지하 유배지의 생활과 다름없어 그런 다음 나는 여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영화는 그 시대의 교양이 아니라 땅콩이며 오징어였다. 그러므로 내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미팅에 나가 영화를 이야기하면 맞은 편에 앉은 여학생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왕따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약간 멋있게 (크리스테바처럼) 말하면 살 르누아르를 드나들던 우리는 일종의 사무라이들이었다.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이 낯선 영화들을 보면서 매번 진검승부 하였다. 나는 처음 여기서 나와 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은 친분을 나누지 않았다. 그때 우리들의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살 르누아르의 영사기사였던 박건섭 선배였다. 건섭형은 우리들의 담임 선생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혼자 사랑하는 것보다 함께 사랑하는 것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때 우리들의 반장이 김홍준 감독이었다. 이 전형적인 모범생은 가늠할 수 없는 영화적 지식과 정보로 아무런 사전정보 없던 우리들에게 하나의 등대처럼 구원의 빛을 보여줬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들이 영화에 관해서 알고 싶은 2~3 가지의 것들을 가르쳐준 첫번째 사람이다. 하지만 홍준 형에게서 우리가 나눠 받은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 영화라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의 환기였다. 여기는 에펠탑 근처의 샤이오궁 시네마데끄가 아니라 청와대 근처 경복궁 맞은편 프랑스문화원이며,
정성일 영화평론가
프랑스 영화는 꽉 막힌 한국에 세계 이슈 보여준 ‘열린 창’ 장 뤽 말랭 프랑스문화원장
2006년 한-프 수교 120년…3월부터 다양한 행사 마련 -왜 특히 영화였을까. =영화는 검열이나 제한 없이 누구든 접근할 수 있는 장르다. 프랑스문화원도 그를 통해 여러 형태의 문화와 환경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줬다. -그땐 일방 통행이고 한편으론 또 다른 편식이었다. =생태계에서 ‘다양성’은 ‘풍요’다. 지구촌 문화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유네스코가 문화다양성 협약을 채택하면서, 문화적 다양성은 이제 프랑스만 중요시하는 주제가 아니다. 한국한테도 중요하다. 다국적 제작배급사 때문에 위험에 처했던 한국 영화가 스크린쿼터제로 정말 강해지질 않았는가. 이젠 프랑스도 다른 문화 영역에서 그런 것처럼 영화 부문에서도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내야 파리 중심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물론 프랑스, 한국 영화도 볼 수 있다. -비전과 계획을 말해달라. =이제 문화원은 프랑스 교육 환경을 진흥시키는 일에 좀더 무게를 두고 있다. 양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오고 갔으면 한다. 문화 영역에서 양국의 울력 작업도 지원할 수 있는 더 나은 파트너십도 만들고 싶다. 영화 쪽 공동작업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김기덕,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엠케이2(프랑스 제작사)와 공동 제작된 것처럼 오랫동안 한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가 만나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올해는 특히 한-프 수교 120주년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3월부터 60개 정도의 다양한 행사를 꾸릴 참이다. 뉴델리, 홍콩에서만 참사관으로 8년을 생활하며 아시아에 눈 밝은 말랭 문화원장. “한국의 역동성과 사람들의 인정이 좋다”는 그가 친구처럼 품평한다. “한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말이 많고, 애국주의자이면서도 쇼비니스트(광신적 애국주의자)이기도 하다고들 해요. 과거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도, 거드름을 피는 것도 좋아하고.” 이제 겨우 한국 생활 1년이라고? <빈집> <웰컴 투 동막골>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송환>까지 도대체 그가 안 본 한국 영화가 드물다. 한국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문을 열어뒀던 셈. “한국은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두질 않아요. 아시아의 ‘라틴’이라고 묘사되곤 하죠. 그래서 전 프랑스와 한국이 꼭 형제처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시네 프랑스’ 매주 1차례씩 나들이 ‘하이퍼텍 나다’ 서 상영 지난 17일 하이퍼텍 나다에선 파브리스 루키니 감독의 <은밀한 여인>(1990년)이 상영됐다. 프랑스문화원과 공동주최한 ‘시네 프랑스’의 첫 상영작이다. 앞으로 주마다 한 차례씩 프랑스문화원에서 준비한 프랑스 영화를 소개하게 된다.
프랑스문화원…문화 해방구이자, 박정희 시대의 슬픈 게토였다
프랑스문화원의 주영애씨는 “예전 전성기와는 비교할 것도 없이, 현재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차라리 바깥으로 나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시네 프랑스에선 2개월 단위로 프로그램을 짜서 다양한 주제로 한국 관객과 소통할 참이다. 유명 감독을 한 달에 한 차례씩 초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할 계획도 짰다. 1·2월 ‘시네 프랑스’의 주제는 ‘프랑스 여인들은 만나다’고, 3·4월은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밀러 등이 만든 ‘범죄영화’ 특선작들로 꾸며진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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