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블 경연 프로그램 <더블 캐스팅>(티브이엔)에서 우승하면서 대극장 뮤지컬 <베르테르>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나현우는 어떤 베르테르로 변신할까? 연습에 매진 중인 그를 지난 12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좀 더 들떠 있을 줄 알았다. “행복해 죽겠다”며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어야 하지 않나. “하하하. 그러기엔 아직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어요. 이제 시작이니까요.” 나현우(27). 이름 세 글자는 생소하지만, 그는 최근 4개월간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경험을 한 주인공이다. 지난 4월 끝난 앙상블(단역과 코러스 등 여러 역할을 도맡는 이들) 경연프로그램인 <더블 캐스팅>(티브이엔)에서 우승하면서 꿈에 그리던 뮤지컬 작품의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오는 28일 개막하는 <베르테르>(11월1일까지 광림아트센터 비비시에이치홀)에서 엄기준, 카이, 유연석, 규현과 함께 ‘베르테르’로 출연한다. “<더블 캐스팅> 이후 간혹 알아보시는 분도 계시고. 인지도라는 게 생겼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하지만 표정에서 들뜸을 읽을 수 없는 건 <베르테르>가 사실상 진짜 그의 검증 무대이기 때문이다.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약속된 주역 자리는 꿰찼지만, 어떻게 소화해내느냐에 따라 더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있다. 심사위원보다 더 매서운 게 관객의 눈이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며 “그래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일찍 연습실에 와서 연출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관련 자료 등을 읽고 캐릭터를 분석하는 건 기본이다. 대극장 무대를 사로잡을 수 있는 발성, 호흡법 등도 꾸준히 훈련하고 있다. “불안할 때는 연습실에 가야 맘이 편해져요. 연습만이 살길이죠.” 그는 “운동을 좋아하는데 베르테르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인물이라는 설명을 보고 5~6㎏을 뺐다. 더 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조승우, 박건형, 송창의, 김다현 등 수많은 남성 배우들이 거쳐 갔기에 ‘나현우만의 베르테르’에 대해서도 고심한다. 이번 공연만 봐도 비교 대상이 될 배우들이 만만치 않다. 엄기준과 규현은 베르테르 경험이 있어서 능숙하고, 카이와 유연석은 베르테르는 처음이지만 베테랑들이다. 그는 “경력도 없고 선배들처럼 능숙하지도 못하다”면서도 “베르테르와 나이대도 비슷하고, 서툰 부분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베르테르보다 풋풋함은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베르테르를 우울하고 슬픔 가득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전 슬픔보단 아픔이 더 크고 굉장히 격정적인 인물이라고 해석했어요. 저의 베르테르에는 그런 부분이 좀 더 자연스럽게 묻어날 겁니다.”
지난 수개월이 온통 베르테르를 향해 있었다.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많은 앙상블(단역)한테 희망이 돼야 한다는 책임감도 크다. 그는 2014년 연극 <햄릿, 여자의 아들>로 데뷔한 후 군대를 다녀온 뒤 2016년 대극장 뮤지컬 <록키>(공연 직전 엎어짐), 2017년 대극장 뮤지컬 <나폴레옹> 등에서 주로 앙상블을 맡았다. 소극장 뮤지컬 <창문너머 어렴풋이>에서 주연을 맡은 적도 있지만 앙상블로 선 적이 더 많다. 대극장 뮤지컬은 보고 또 보는 ‘회전문 관객’이 중요하기에 티켓파워가 있는 주연 배우가 필요하다. 팬덤이 없는 무명 배우가 주역이 되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도 “모든 앙상블이 원하는 것처럼 주연을 꿈꿨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오디션을 봤지만, 배역을 따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점차 더 많이 내려놓게 됐다”고 말했다.
“앙상블일지라도 배우로 부름을 받는 것만으로 행복해하자”는 생각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았다. 무대 세트를 만들고, 모델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오전에는 돈을 벌고 저녁에는 무대에 섰다. 공연이 끝나고 새벽에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앙상블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생계 때문에 대리운전·레슨 등을 하는 이들도 있다. 뮤지컬 주연 배우의 출연료가 회당 수천만원인 시대가 됐지만 앙상블은 대개 몇만원을 받는다. 나현우는 “갈 길이 멀지만 정말 열심히 해서 앙상블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가 바라봐주지 않아도 열심히 했어요. 하늘이 알아준 건지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그는 <더블 캐스팅>에 지원한 건 “20대 후반이 되니 배우로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였다”며 “감정을 온전히 보여주며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내던진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간절함으로 그는 배우 조정석이 소속된 잼엔터테인먼트의 문을 직접 두드렸다. <더블 캐스팅> 이후 수많은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지만,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초심을 떠올려 무작정 찾아가 기다린 끝에 관계자에게 프로필을 건넸다. 그는 “너무 많은 관심에 혼란스러웠지만, 내가 뮤지컬 배우를 왜 꿈꿨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했고, 그 이유가 됐던 조정석 선배와 함께라면 잘 안되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며 무대를 향한 진심을 드러냈다. 이런 진정성이 나현우에게 꿈같은 기회를 준 것이 아닐까. 뮤지컬을 향한 진정성은 그를 또 어떤 곳으로 이끌어줄까. 그는 “나현우 베르테르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하겠다”며 빙그레 웃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