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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가 수선되는 중입니다, 망가진 것들의 우아한 환생

등록 2020-05-23 15:36수정 2020-06-04 18:01

[토요판] 현장
‘수선하는 삶’ 전시

‘소비 천국’ 가로수길 한가운데
‘수선하는 삶’ 연속 전시 열려
깨진 도자기, 쓰고 버린 유리병
파손된 책 이어 붙이고 ‘새활용’

“사물의 훼손된 부분 고쳐갈 때
비로소 그 물건 완성되어갈지도”
손상과 회복 거듭하는 삶의 은유
맥주병 등 버려진 유리병이 근사한 유리잔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유리를 재료로 삼은 드문 유리공예가 박선민의 작품 ‘리:앤티크 시리즈’(2019). 516 studio 제공
맥주병 등 버려진 유리병이 근사한 유리잔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유리를 재료로 삼은 드문 유리공예가 박선민의 작품 ‘리:앤티크 시리즈’(2019). 516 studio 제공

「▶ 새것을 만들어내는 작업만이 장인의 일은 아닐 겁니다. 헌것을 고치고, 금 간 자리를 메우고, 폐기된 것들을 불러들여 새 쓰임과 생명을 불어넣는 일도 장인의 일입니다. 망가진 데를 고치는 노력은 시간을, 삶을 수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견고해지고 나면, 다시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 있으니까요. 가로수길에 ‘수선’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전시가 마련됐습니다. 깨진 도자기, 버려진 유리병, 파손된 책을 새롭게 활용하는 세 작가를 조명하는 자리입니다.」

‘수선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전시는 다소 의아한 장소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10길 21. 철저히 상업화된 공간 중 하나인 가로수길 한가운데서 그 성격을 거스르는 삶, ‘낡거나 헌 물건을 고치는 삶’이 전시되는 셈이다. 깨진 도자기, 쓰고 버려진 유리병, 파손된 책. 세 물건의 수선을 주제로 두달(4월15일~6월17일)에 걸쳐 열리는 릴레이 전시 ‘수선하는 삶’ 현장을 지난 19일 찾았다.

‘리:앤티크 시리즈’(2019). 516 studio 제공
‘리:앤티크 시리즈’(2019). 516 studio 제공

전시장은 ‘플레이스(place)1-3’. ‘주차금지 고깔’ 크기의 무채색 세움 간판을 확인하고서 그곳에 다다랐다. 플레이스1-3은 전시와 워크숍이 이뤄지는 공간과 문구·식기·차 등을 판매하는 편집숍으로 이뤄진 복합문화공간이다. 애초 가정집이던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원래 살던 이가 달아둔 나무 창틀, 잠금쇠까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한낮에도 유행가를 쩡쩡 울리며 신상품을 내건 상점들 속에서, 플레이스1-3의 문을 열면 무슨 ‘차원의 문’이 열린 듯 고요한 세계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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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어진 것의 새로운 쓸모

‘수선하는 삶’ 전시장 입구에는 버려진 유리병들이 관객을 맞는다. 작가에게는 창작의 재료다. place1-3 제공
‘수선하는 삶’ 전시장 입구에는 버려진 유리병들이 관객을 맞는다. 작가에게는 창작의 재료다. place1-3 제공

이날은 ‘수선하는 삶’의 두번째 프로그램 ‘새활용 공예―리보틀메이커’(5월13~20일) 전시가 관객을 맞았다. 한번 쓰고 버려진 유리병이 이번 프로그램의 주인공. 폐유리병을 재료로 삼는 드문 유리공예가 박선민(37)이 참여했다. 박 작가는 2014년부터 ‘리보틀’(Re:bottle)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유리병을 모아 새로운 용도를 지닌 유리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는 6년간의 작업 흐름을 볼 수 있도록 마련된 아카이빙 전시로, 대표적인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지붕 형태 그대로를 천장으로 만든 다락방이 전시장이었다. 규칙적이고 낮은 음이 가득한 공간. 슥삭, 쓱싹, 서걱, 써걱, 유리 표면을 갈고 닦는 연마의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다이아몬드 입자가 뿌려진 ‘연마 디스크’가 돌아갈 때 나는 소리다. 연마 디스크는 실제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엘피(LP)처럼 기계에 끼워서 사용한다.

엘피(LP)처럼 보이는 둥근 판들이 연마 디스크. 유리의 연마는 7~10단계까지 길고 섬세하게 진행된다. 석진희 기자
엘피(LP)처럼 보이는 둥근 판들이 연마 디스크. 유리의 연마는 7~10단계까지 길고 섬세하게 진행된다. 석진희 기자

박선민표 ‘새활용’의 재료가 된 유리병들은 ‘과거’도 ‘국적’도 다양했다. 수입 맥주, 와인, 사케, 사과주스, 비타민 음료, 숙취 해소제, 파스타 소스, 올리브유…. 무엇인가를 담았던 유리병이라면 모두 찾아 모은 듯했다. 수선이라는 ‘새로 고침’을 당한 병들에는 이제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다. 찻잔, 술잔, 접시, 그릇, 보관함, 꽃병, 촛대부터 샹들리에와 오브제까지.

박 작가는 단순히 폐유리병을 다시 쓰는 재활용(리사이클링)이 아니라, 유리를 절단해 서로 다른 조각을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새로운 용도와 가치를 부여하는 유리 업사이클링 작업을 한다. 일회용이라는 쓰임을 끝으로 유기됐던 사물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일상의 용품으로, 또 예술작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place1-3 제공
place1-3 제공

손잡이는 맥주병 등의 주입구를 잘라 붙인 것이다. 유리는 모래바람을 이용해 무광으로 표현할 수 있다. ‘리:앤티크 시리즈’. 516 studio 제공
손잡이는 맥주병 등의 주입구를 잘라 붙인 것이다. 유리는 모래바람을 이용해 무광으로 표현할 수 있다. ‘리:앤티크 시리즈’. 516 studio 제공

사과주스병 무늬를 그대로 쓴 ‘새활용 유리공예. 식물 무늬를 살린 부분과 다른 유리병의 절단면을 이어 붙였다. 꽃병이나 촛대로 쓸 수 있다. place1-3 제공
사과주스병 무늬를 그대로 쓴 ‘새활용 유리공예. 식물 무늬를 살린 부분과 다른 유리병의 절단면을 이어 붙였다. 꽃병이나 촛대로 쓸 수 있다. place1-3 제공

버려진 유리병들이 빛나는 <리:보틀 샹들리에>(2017). 유리병에 드로잉을 하고 철, 적동, 황동을 결합했다. 박선민 제공
버려진 유리병들이 빛나는 <리:보틀 샹들리에>(2017). 유리병에 드로잉을 하고 철, 적동, 황동을 결합했다. 박선민 제공

‘수선하는 삶’을 기획한 나웅주(40) 플레이스1-3 대표는 이날 <한겨레>와 만나 “한낱 버려진 유리병이 수거되고, 세척되고, 연마된 뒤 놀라운 존재감을 지닌 작품으로 탄생한다”며 “박선민 작가의 작업은 쓸모없어진 것의 새로운 쓸모를 깨우쳐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나웅주 place1-3 대표. 나웅주 제공
나웅주 place1-3 대표. 나웅주 제공

누구나 한번쯤 경험한 적 있는 평범한 일이 나 대표에겐 가로수길 한복판에서 ‘수선하는 삶’을 이야기하게 된 발단이 되었다. 쓰던 그릇이 깨진 날, 유독 이대로 버리기엔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뭔가를 깨뜨리는 경험도 하지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험은 왜 하려 하지 않을까요? ‘방법이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시 붙여볼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저부터도 태도가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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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뒤 붙인 그릇을 귀한 손님께

그 그릇을 다시 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던 중, 일본 전통 도자기 수리 기법 ‘긴쓰기’ 교실을 찾아가게 됐다. 긴쓰기는 생옻, 토분, 목분 등 천연 재료를 접착제 삼아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어붙인 뒤 순금, 순은으로 장식해 마무리하는 공예 기법이다.

깨진 그릇이 복원되자 상처였던 금을 따라 전에 없던 무늬가 생겼다. 복원된 그릇은 보관이라는 용도를 다시 얻고, 동시에 하나뿐인 무늬를 가진, 새로운 사물이 된 셈이다. 이러한 손상과 회복을 거치면서 비로소 ‘기물’이 되는지도 몰랐다. ‘자기 물건’ 말이다.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인 작품. place1-3 제공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인 작품. place1-3 제공

“수선이라고 하면 경제성만 생각하곤 해요. 덧대서 쓰기. 아껴서 더 오래 쓰기. 하지만 쓰임이 다한 물건에 새 호흡을 불어넣는 일은 그 이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긴 시간 망가진 부분을 고쳐갈 때 그 물건이 비로소 완성돼가는 건 아닐까… 진정으로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물건, 풍부한 이야기를 가진 물건은 그런 것이겠지요.”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옻칠 기법으로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어 붙이는 모습. place1-3 제공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옻칠 기법으로 깨진 도자기 조각을 이어 붙이는 모습. place1-3 제공

일본 전통 도자기 수리 공예인 ‘긴츠기’ 기법을 사용하는 김수미 작가. place1-3 제공
일본 전통 도자기 수리 공예인 ‘긴츠기’ 기법을 사용하는 김수미 작가. place1-3 제공

도자기 수리도 공예의 한 분야다. 새 도자기를 빚는 작업만큼 도자기를 수리하는 작업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place1-3 제공
도자기 수리도 공예의 한 분야다. 새 도자기를 빚는 작업만큼 도자기를 수리하는 작업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place1-3 제공

‘수선하는 삶’의 첫번째 프로그램 ‘도자기 수리’ 전시(4월15~22일)를 맡았던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는 일본 교토에서 긴쓰기를 공부했다. 그는 “교토에선 귀한 손님에겐 오래 사용한 귀한 그릇으로 대접하는 문화가 있는데, 그렇다 보니 긴쓰기 그릇이 손님상에 오르곤 한다”며 “깨진 도자기를 붙이려면 새 도자기를 빚는 것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 세월의 상처를 긴쓰기로 메운 그릇을 두고 대화하다 보면 회복과 지속의 가치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은 상처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은유라고 생각한다”고 도자기 수리의 의미를 강조했다.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인 작품. place1-3 제공
김수미 도자기 수리 공예가가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인 작품. place1-3 제공

헌 도자기를 고치는 작업도 엄연히 공예의 한 분야다. 그리고 이 기술엔 새로운 것을 생성할 때와는 다른 ‘거스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김수미 공예가는 수선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도자기에 매번 같은 수리법을 쓸 수 없어요. 다양한 그릇의 상처를 만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반복이지만 반복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수선하는 태도는 반복되는 일상을 충분한 만족과 소소한 행복으로 채울 힘이 있습니다.”

place1-3 제공
place1-3 제공

‘수선하는 삶’(www.instagram.com/place1_3)은 세번째 프로그램 ‘책 수선’(6월10~17일)을 앞두고 있다. 찢어지거나 손상된 페이지, 책등, 표지 등을 복원하는 책 수선가 ‘재영’의 작업이 소개된다. 전시는 무료. 작가 워크숍 등 프로그램은 유료로, 별도 신청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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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정된 전시 일정을 앞두고 플레이스(place)1-3에서 ‘책 수선’(6월10~17일) 프로그램을 취소한다고 알려왔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방역당국이 6월14일까지 수도권 다중이용시설 운영을 중단하는 등 방역 조치를 강화하는 데 따른 조처입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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