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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왜 김덕수일까? “5살때부터 지난 63년, 신명나게 살았잖아”

등록 2020-05-19 17:34수정 2020-05-20 12:08

[세종문화회관 명인 시리즈 2탄 ‘김덕수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장터 갔던 그날부터
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명인으로서의 여정
사물놀이 현대화와 세계화에 바친 인생
“즐겁게 놀다보니 시간이 흐른지도 몰라
이번 작품 준비하며 처음 인생에 중압감”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차가 아니라 커피를 주문했다. “매일 아침 핸드드립으로 마셔요. 커피를 아주 좋아해. 하하하.” 답변에 이은 호쾌한 웃음은 상대의 놀라는 표정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차만 마실 것 같지? 아니야. 하지만 달달한 커피는 안 마셔요. 당분을 많이 섭취하면 성인병 걸리거든.” 모름지기 명인이란 전통차를 마시고 무서운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지는 ‘엄근진’(엄숙·근엄·진지) 아니었나. 가끔 불호령도 내리고.

지난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김덕수는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명인에 대한 편견을 싹 사라지게 했다. ‘예능의 명인’ 같은 유쾌한 입담에 2시간 인터뷰 동안 준비한 질문의 절반도 채 하지 못했다.

63년간 지치지 않고 예인의 길을 걷게 한 힘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와 마주한 첫 느낌처럼 “하루하루가 신명 났기 때문”이다. “63년 전 일이지만 어제처럼 생생해요. 1957년 추석 다음날이었어.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어. 큰 가마솥, 장국밥, 환호하던 사람들…. 장터의 생동감 넘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도착한 첫날 그는 어른 세명 위에 올라타 ‘무동’이 됐다. 5살(우리 나이 6살) 어린아이가 낯선 장소에서 무섭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의 대답에서 타고난 예인의 기질이 읽힌다. “너무 좋았어요. 어른 세명 위까지 올라갔어. 내가 4층 꼭대기에서 밑을 다 내려다보는 거야. 무동이 최고 인기였던 시절이지요. 한 시간 이상 했어요. 새미놀이라고 하는데, 내가 새미야. 신명 났지.”

첫 기억의 좋은 느낌은 63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한 분신으로 살았다”지만, 아쉬움이 생길 틈 없이 예인으로서의 인생은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7살 때인 1959년 빼어난 장구 실력을 뽐내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중·고교 때는 한국민속가무예술단과 리틀엔젤스예술단원에 뽑혀 전세계를 누볐다. “국민(초등)학교 6년 전체 출석 일수가 300일도 안 돼. 학교에 너무 안 가니 3학년 때인가 어느 날 퇴학을 당했어. 근데 그즈음 대통령배 대회에서 1등을 했거든. 별 두개 장군이 불러 어느 학교 다니냐고 묻길래 잘렸다고 했더니 바로 복학시키더라고. 하하하. 그때는 그런 게 가능하던 시절이었지.” “사실은 말이야”라며 옛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는 표정이 개구진 아이와 같다.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타고난 끼에 기대어 영광에 취했다면, ‘김. 덕. 수’ 이름 석 자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호의호식하는 대신 사라져가는 전통을 지키는 데 재능을 쏟았다. 1978년 사물(꽹과리·징·장구·북)놀이를 만든 것도 풍물이 저물던 때에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전통은 고루하다는 편견이 생길까 봐 시대 흐름에 맞춰 줄곧 변화를 꾀했다. 1983년 서울시향과 최초의 사물놀이 협주곡을 연주했고, 2010년엔 디지털과의 접목도 시도했다. “전통을 발전시키는 게 내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사물놀이를 전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것도 삶의 목표였죠.” 1982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에 참가해 사물놀이를 세계에 처음 선보였고, 2017년 일본에서 남북 국적 예인을 아울러 만든 ‘하나로 사물놀이단’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덕수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지난 60여년간 시대의 울분 속에 늘 그가 있었다. “정치적 이념은 없다”지만 “풍물은 기본적으로 민초의 풀뿌리 문화이기에 시대를 대변하고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진 건 1987년이었다. 이한열 열사의 추모 굿을 겸한 공연 <바람맞이>에서 춤꾼 이애주는 소복을 입고 사물놀이에 맞춰 물고문과 불고문을 표현했다. “잡혀갈 각오를 하고 공연했어요. 양심에 의한 거였지. 이거는 해야 한다.” 지금은 그의 상징이 된 수염도 그때부터 기른 저항의 표시였다. “저항의 의미로 기르기 시작해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지. 하하하.”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명인 김덕수. 세종문화회관 제공
하지만 사물놀이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2017년 9월1일 그가 설립한 사물놀이 전용 극장 인사이트홀은 문을 닫았다. 김덕수의 후예가 곳곳에서 활동하지만, 그를 뛰어넘을 만한 차세대 스타는 없다. 그는 “난장 문화를 재생산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전용공간이 없는 것은 아쉽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복 받은 삶, 감사할 게 많은 삶”이라고 했다. 이날 들려준 ‘김덕수의 63년’은 오는 28~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상연하는 음악극 <김덕수전>에 오롯이 담긴다. 이동연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가 그의 삶을 극본으로 썼고, 박근형 연출이 극으로 빚었다. 세종문화회관이 명인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시리즈로, 지난해 명창 안숙선에 이은 두 번째다. 그는 “<김덕수전>을 제안받고서야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고 한다. “5살 이후 난 늘 같은 곳에서 신명 나게 놀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몰랐어요. 한순간인 것 같아.” 그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인생에 중압감이 생기더라”면서도 “지난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 눈망울이 잠시 그윽해진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 많은 인연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정에 좀 더 귀 기울였으면 어땠을까….” 그 사연도 극에 담긴다. 그가 다시 웃음을 찾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신명 나게 살 겁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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