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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언니들의 록 샤우팅, 뮤지컬의 ‘착각’을 깨다

등록 2020-05-03 17:51수정 2020-05-04 02:34

[국내 초연 ‘리지’로 본 여성 뮤지컬]
기존 남성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 배우+여성 관객 연대 형성
대사보다 록 음악으로 무대 꾸려
폭력·억압의 분노 과감히 드러내

‘여성 관객은 남성 배우 선호’한다는
뮤지컬·연극계 선입견 뒤집어엎고
미투·페미니즘·N번방 사건 겪어낸
2030 젊은층에 공감·호응 얻어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지난달 28일 서울 대학로 한 공연장. 20~30대 여성 관객들로 객석이 꽉 찼다. 남성 관객은 서너명 정도. 여성 관객 점유율이 70% 이상인 뮤지컬 시장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하지만 막이 오르는 순간 이 모습은 의미 있는 현장으로 바뀐다. 무대 위 출연자 4명이 모두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뮤지컬이 젊은 여성 관객을 끌어모으는 건 이례적이다.

라이선스 초연 뮤지컬 <리지>가 화제다. ‘남성 배우+여성 관객’ 일반적 조합을 벗어나 여성 배우와 여성 관객의 연대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리지>의 여성 관객 비율은 94.6%(남성 5.4%)로, 이 중 2030 비중이 85.4%(20대 52.6%, 30대 32.8%)에 이른다. 그동안 업계에선 여성들만 나오는 뮤지컬은 주관객층인 2030 여성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 선보이지 않았다. 2인극 등 남성 배우로만 구성된 뮤지컬은 해마다 줄을 이었지만, 반대의 경우는 2018년 <베르나르다 알바>, 2005년 <메노포즈>, 1991년 <넌센스>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제작사 쇼노트 쪽은 “이마저도 공연 기간이 짧거나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만 나오는 장기 뮤지컬이 2030 여성을 타깃으로 삼은 경우는 <리지>가 사실상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뮤지컬 &lt;리지&gt;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는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던 리지가 억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이야기를 담는다.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실제로 일어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이 모티브다. 보든가 둘째 딸 리지가 친부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되지만 결정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무혐으로 풀려난 사건이다. 당시 용의자가 여성인데다 피해자의 딸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충격이 컸다. 사건 자체가 드라마틱해서인지 지난 100여년간 소설,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됐다. 2017년 넷플릭스 드라마 <리지 보든 연대기>가, 2019년 영화 <리지>가 개봉됐다. 뮤지컬은 2009년 미국 뉴욕에서 초연했고, 이번에 한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무대와 만난 <리지>는 록 뮤지컬 형식을 취한다. 내용을 압축하면서 서사가 약한 아쉬움은 크지만, 시원하게 내지르는 통쾌함을 더하며 2030 여성을 사로잡는다. 대사를 줄이고 이야기 상당 부분을 록 음악으로 대신한다. 배우들이 나란히 서 스탠드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도 한다. 무대 뒤에선 6인조 밴드가 라이브 연주를 한다. 이런 형식은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고통받던 리지를 보며 쌓이는 분노를 표출하는 해방구가 된다. 28일 혼자서 공연을 관람한 20대 여성 관객은 “아버지에게 구속당하는 등 리지의 사연은 무겁고 안타깝지만, 록 콘서트처럼 펼쳐지는 형식 덕분에 속이 시원하더라”고 말했다.

뮤지컬 &lt;리지&gt;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하지만 개막 전까지도 “관객이 좋아할지 내부에서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김태형 연출은 “여성만 나오니 표가 잘 팔릴까 걱정도 됐지만, 무엇보다 딸이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그런 아버지를 딸이 살해하는 등의 내용이 한국 정서에 맞을까 고민이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투·페미니즘 등 여성 연대가 화두가 되고, 엔(n)번방 사건 등에 분노하는 등 남성 중심 사회에 변화를 촉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점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김 연출은 “이런 분노를 솔직하고 과감하게 드러내 관객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쇼노트 송한샘 부사장은 “뮤지컬은 대부분 사랑 이야기나 대서사가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내용이 가슴 깊이 다가갈까 의문을 가졌다. 이제는 <리지> 같은 이야기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맥락이 형성됐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마리 퀴리> 등 수년 사이 여성 서사를 강조한 작품이 늘어난 것도 변화의 디딤돌이 됐다.

뮤지컬 &lt;리지&gt;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리지> 속 인물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스스로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2030 여성 관객이 <리지>에 환호하는 현실은 뮤지컬·연극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 관객은 남성 배우를 좋아할 것’이라는 오랜 선입견은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기반한 작품만 양산해왔다. 송 부사장은 “좋아하는 남성 배우가 나오는 작품을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왜 남성 주인공만 나오는가 하는 의문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 배우만 10명이 나왔던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2주간 공연했는데 티켓 판매 시작 2분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김태형 연출은 “여성 캐릭터나 여성 배우를 어떤 식으로 무대 위에서 선보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리지>에 출연하는 이영미 배우는 “남녀 출연자 성비가 고른 작품이라 해도 서사 자체가 남성 위주로 이뤄지는 작품이 많은 상황에서 여성 배우 네명이 무대에 선 것은 의미가 크다”며 “단순히 ‘여성 배우의 설 자리’ 문제가 아니라 여성 관객의 요구가 달라지고 진보하고 있다는 점이 가치 있다”고 말했다. 6월21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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