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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극” …이분들, 열정만은 ‘청년’

등록 2020-03-01 16:22수정 2020-03-02 11:23

[이순재·신구·손숙 ‘방탄노년단’]
연기경력 합치니…무려 180년
1950~60년대 연극계 뛰어들어
영화·드라마까지 작품 수백편
지난해 연극만 3~6편 꾸준하게
공연 뒤 ‘퇴근길’ 지키는 팬들도

“연예인 나부랭이…듣던 시절엔”
전 세계서 활약하는 ‘기생충’ ‘방탄’
이런 시절 올 지 생각도 못했지
연극은 돈 많이 들여도 수입 뻔해
기초예술이 튼튼해져야 하는데…
이순재(왼쪽)와 신구(오른쪽), 손숙은 연극은 물론 드라마·영화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세대를 넘어 사랑을 받는다. 방탄노년단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 뺨칠 정도의 열정과 기운을 본다면 ‘방탄청년단’이 아닐지. 그들을 최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순재(왼쪽)와 신구(오른쪽), 손숙은 연극은 물론 드라마·영화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세대를 넘어 사랑을 받는다. 방탄노년단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하지만 젊은 세대 뺨칠 정도의 열정과 기운을 본다면 ‘방탄청년단’이 아닐지. 그들을 최근 서울 종로에서 만났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 오빠”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했다. 선생님은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이 많은 어른에 대한 존칭이기도 한데, 직접 만나본 그들의 기운은 노년이 아니라 청년이었다. 마주 앉으니 상대방도 활기차게 만드는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듯하다. 노년과 청년을 구분하는 기준이 열정이라면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청년이다.

요즘 쉴 새 없이 연극 무대에 오르며 관객층 신구세대 확장에 앞장서는 방탄노년, 아니 방탄‘청년’단 이순재(85), 신구(84), 손숙(76)을 최근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한 이순재와 신구는 패션 감각도 남달랐다. 이순재는 회색 재킷 안에 자주색 조끼를 받쳐 입고, 신구는 검은 니트에 베레모로 멋을 냈다. “너무 멋지시다”는 감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에 스카프를 두르고 등장한 손숙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손숙씨가 멋지지. 우리는 아니야. 하하하.”(이순재)

오랜 친분을 자랑하는 세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따로 또 같이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각각 3~6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손숙과 신구는 지난 29일 끝난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서 부부로 나왔고, 손숙과 이순재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별곡>에서 부부였다. 이순재와 신구는 <앙리 할아버지와 나>에서 한 배역을 번갈아 맡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장수상회>에는 세 사람 모두 함께 출연했다. 연극을 하면서도 <쌉니다 천리마마트>(이순재), <아스달연대기>(손숙), <천문>(신구)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빼놓지 않고 활약하며 여러 세대에게 사랑받아 ‘방탄노년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순재 “햄릿을 못 해봤어. 꼭 해보고 싶은데.” 박종식 기자
이순재 “햄릿을 못 해봤어. 꼭 해보고 싶은데.” 박종식 기자

‘어디서 이런 체력이 나올까’ 싶은데 이들은 “체력이 되니까 하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사람들이 가끔 좀 쉬지 그러냐고 해요. 그런데 아마추어가 아니고 일이잖아. 이게 직업인데 일을 어떻게 쉬어요. 그치?”(손숙) 손숙이 동의를 구하듯 팔꿈치로 툭 치자 신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직진 순재’의 속사포 답변. “우리 셋은 제일 먼저 시작한 게 연극이라고. 나는 60년대 티브이에 출연했는데 그건 나중 얘기고. 이쪽에 충동이 인 계기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옛날 명작 외화를 보다 거기서 예술성을 발견한 거고. 영화는 나 같은 사람은 체격이 작아서 쓰지를 않아. 그래서 후배들이 우리끼리 모여 연극이라도 해보자고 해서 연극을 하기 시작했고….” 아! 대답 한마디에 연극을 사랑하는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담겼다.

그들이 계속 무대에 오르는 건 부르는 곳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구는 1962년 연극 <소>, 손숙은 1963년 연극 <삼각모자>, 이순재는 1956년 대학 3학년 때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이후 50~60년 동안 연극,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각각 수백 편의 작품에 출연했는데, 그 명연기를 눈앞에서 보는 느낌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그래서 <그대를 사랑합니다> <장수상회>의 경우 노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데 젊은 세대도 많이 봤다. 공연을 끝내고 나오는 이순재를 보려고 기다리는 ‘퇴근길’ 팬도 있다.

신구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운동.” 박종식 기자
신구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운동.” 박종식 기자

우린 아직도 연기가 고프다
“앞날 기약하기 쉽지 않은 나이
공연 때 마지막일 수 있겠다 생각
이렇게 일하고도 5층 빌딩 없지만
인생 최고의 선택은 이거, 연기”

단지 오래 했다고 존경받는 게 아니다. 언제까지나 ‘현역’이란 자세로 매 작품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손숙·신구와 함께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 출연한 조달환은 “약속시간보다 늘 일찍 오시고 연습 때도 쉬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신구는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서 간암에 걸린 인물을 표현하려고 체중감량까지 했다. 이들은 특히 “대사가 기본”이라는 생각에 대본 숙지에 심혈을 기울인다. 손숙은 “신구 선생님은 첫 연습 때 대본을 다 외우고 온다”고 말했다. 이순재와 손숙의 대본에는 대사 마디마다 깨알 같은 번호가 쓰여 있다. “외워야 할 게 총 몇 마디고 어디까지 외웠는지 신경 쓰며 외우는 나름의 계산법”이라고 했다. 손숙은 “그냥 통째로 외우기만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자기 대사만이 아니라 대본 전체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사 못 외우면 아무리 기운이 뻗쳐도 할 수가 없다고!”(이순재) 이순재는 지금도 뮤지컬, 연극 할 것 없이 많은 공연을 보러 다니며 후배들을 응원하고 공연계 흐름도 읽는다.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것은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연극을 하겠다고 오는 후배들은 다 이쁘다”(손숙)고 할 만큼 연극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들 셋은 연극계의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란다. 최근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고, 방탄소년단이 사랑받는 등 한국 대중문화는 세계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연예인 나부랭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부터 일했기에 “이런 시절이 온다는 생각도 못 했다”(손숙)며 감격해한다. “요즘은 우리 때와 달리 재능과 조건을 타고난 친구들이 많아. 우리는 한달이 걸려도 안되던 것을 요즘 친구들은 금방 배우단 말이야. (한국 콘텐츠는) 더 빛날 거야.”(이순재) 하지만 연극판은 여전히 척박하고 배고픈 동네다. 기초예술이 자리를 못 잡으면 대중예술만으로는 문화예술이 깊이있게 성장할 수 없는데도 지원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연극은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도 나오는 수입이 뻔해요. 기초예술이 튼튼해야 대중예술도 튼튼해져요. 정부의 지원이 꼭 필요한 이유죠.”(손숙)

손숙은 “연극한다고 오는 후배들은 다 이쁘다”며 미소지었다. 박종식 기자
손숙은 “연극한다고 오는 후배들은 다 이쁘다”며 미소지었다. 박종식 기자

요즘은 더 좋은 어른이 되려는 노력도 한다. 손숙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이 캔 스피크> <귀향> 등 의미있는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고, 이순재가 끊임없는 기부 등으로 사회적 나눔 활동에 앞장서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세 사람을 한데 모아놓으니 서로 다른 성격이 오히려 조화를 이뤄 진짜 그룹 멤버들 같다. ‘못 먹어도 고’를 외치듯 적극적이고 발빠른 첫째 이순재와, 차분하고 듬직한 둘째 신구, 그리고 똘망똘망 귀여운 막내 손숙이다. “부인인데.”(신구) “하하하. 전에 누가 몇십년 산 부부 같다 그랬어.”(손숙) “평소 연락을 잘 안 한다”지만 서로를 아끼는 마음도 상당하다.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가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지난 2월16일 두 사람의 공연을 보러 온 이순재는 대기실에서 신구의 손을 깍지 끼어 잡으며 말없이 응원했다. “동지 같고 전우 같아요. 함께 있으니 더 에너지가 솟는 것 같죠.”(손숙) “이제 몇 명 안 남았으니까. 하하하.”(이순재)

이런 농을 아무렇지 않게 할 만큼 어느덧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은 나이가 됐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문득문득 다가온다. “우리 나이엔 앞날을 기약하기가 쉽지 않다고. 이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해. 우리가 더블캐스트를 하는 건 그런 이유도 있어.”(이순재) “난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공연 때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래서 더 애틋해지기도 하고.”(손숙) 신구는 “거의 매일 한시간씩 걷고 자전거를 타고”, 이순재는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이 뭐냐고 물으니 모두 “연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돈 버는 재능은 없으니까. 이 정도 일했으면 5층짜리 빌딩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우린 다들 없잖아.”(이순재) “있어서 뭐 해.(웃음)”(손숙) 그저 연기가 좋아서, 연극이 좋아서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세 배우의 연기는 돈보다 값지다.

돈 욕심은 없지만 일 욕심은 많다. 열정으로 가득한 방탄청년단은 그렇게 많은 작품을 했는데 아직도 배가 고프다. 하고 싶은 연기가 있냐니 이순재는 주저 없이 “햄릿”을 꼽았다. “기회가 없어서 햄릿을 못 했어. 그건 꼭 해보고 싶어.” “어 두 분 라이벌이네. (신구를 보며) 햄릿 하고 싶어 하시잖아.”(손숙) “허허허”(신구) “그럼 난 오필리아 할까. 난 맨날 할머니잖아. 나도 박정자 선생님이 한 그런 거(<노래처럼 말해줘>와 <19 그리고 80>) 하고 싶어. 근데 그런 건 박정자 선생님 아니면 소화를 못 해. 하하하”(손숙) <19 그리고 80>은 노인과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이 상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신구가 말했다. “가자 이제. (공연) 준비해야 돼.”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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