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과거 콘텐츠는 최신 유행이 된다. 유튜브 속 ‘1991년 양준일’이 2020년 티브이에 등장하는 시대,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아이피티브이(IPTV)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오티티·OTT)의 대중화로 종영한 드라마도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 짧은 설 연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지금 봐도 신선한 ‘탑골 드라마’를 찾아보면 어떨까. 종영한 지 15년 이상 된 작품 중 지금 봐도 재미있는 ‘탑골 드라마’를 평론가·기자·피디가 3편씩 추천했다.
■ ♣남지은 기자 =
1. 네 멋대로 해라 2. 맛있는 청혼 3.떨리는 가슴(그리고 <빠담빠담>)
2002년 방영한 <네 멋대로 해라>(문화방송)는 어떻게 이런 드라마가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흠잡을 곳이 없다. 내용도 연기도 연출도 백점 만점에 백점이다. 스턴트맨을 하며 어렵게 사는 고복수(양동근)가 인디 록 키보디스트 전경(이나영)을 만나 세상을 다르게 살기 시작한다. 시한부 설정도 나오지만, 요즘 드라마처럼 갈등 해소용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양동근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요즘은 예능프로그램에 주로 소비되는데,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가를 이 작품은 말해준다.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들이 꽤 있다. 뇌종양을 앓는 양동근이 혼자 남게 될 아버지(신구)의 발을 씻겨주고, 밥상을 차려주고, 쌈을 싸서 먹여주는 등 아들 노릇을 하려는 장면 등에서 ‘눈물주의보’가 내려진다. 무엇보다 보고 나면 가슴 먹먹해지는데, 드라마가 마음을 보듬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양동근과 이나영이 촬영했던 버스정류장은 방영 이후 성지순례지가 됐다.
2001년 방영한 <맛있는 청혼>은 요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풋풋한 드라마다. 손예진, 권상우, 소유진, 소지섭 등 입이 떡 벌어지는 스타들의 과거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사실 이들은 당시만 해도 모두 신인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와 <맛있는 청혼>을 모두 연출한 박성수 피디(PD)는 작품마다 연기 잘하는 신인을 발굴해 스타로 만들었다. 두 작품 모두 멋 부리지 않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잔잔함을 준다.
2005년 방영한 <떨리는 가슴>(문화방송)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시도가 눈길을 끌었다.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인생에서 가장 떨렸던 여섯 개의 순간을 드라마로 엮었다. 각 단편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것이다. 오경훈, 고동선 등 연출가와 김인영, 홍진아 등 작가들이 회를 나눠 맡은 시도가 이례적이었다.
그리도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 2011년 <제이티비시> 개국 드라마로 선보인 <빠담빠담>은 더 찬사를 받았으면 하는 작품이다. 당시 시청률 2.2%였지만, 종합편성채널에 익숙하지 않은 시절이라 화제성은 약했다. 노희경 작가가 집필했고, 정우성, 한지민이 나온다. 정우성은 영화 <증인>으로 2019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는데, <빠담빠담>에서 그의 연기는 <증인> 이상으로 빛난다. 살인 누명을 쓰고 16년 만에 출소한 양강칠(정우성)이 수의사 정지나(한지민)를 만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정우성이 치킨을 뜯는 1회 첫 장면부터 연출이 시선을 끈다. 천사·타임슬립 등이 잔잔한 드라마에 아무렇지 않게 녹아들어 간 점도 흥미롭다. 자신을 천사라 믿는 이국수(김범) 캐릭터가 특히 좋다.
■ ♣정덕현 평론가 =
1. 가을동화 2. 허준 3. 종합병원 (그리고 <나인>)
정덕현 평론가는 <가을동화>를 지금 봐도 ‘핫이슈’가 될 작품으로 꼽았다. <가을동화>는 2000년 <한국방송2>에서 방영한 ‘윤석호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2002년 방영한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지금의 한류가 시작됐다. 2003년 <여름향기> 2006년 <봄의 왈츠> 2012년 <사랑비>까지 윤석호 피디(PD)는 주로 잔잔하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었다. 정 평론가는 “<가을동화>는 송승헌, 송혜교, 원빈 등 한류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고 송혜교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문근영의 연기가 특히 화제였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남매로 지내오던 준서와 은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도, 애절한 내용을 좋아하던 당시 시청자들을 쉽게 끌어들였다. 전개가 빠르고 숨 가쁘게 흐르는 요즘 드라마 문법과 달라 차분하고 잔잔한 감상할 수 있다. “지금의 드라마들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당시 드라마들은 잔잔하다. 우리나라 자연과 풍경을 멜로에 잘 녹여서, 그런 것들을 주의 깊게 보면 더 재미있다.”
진짜 명작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1999년 <허준>(문화방송)”이다. 정 평론가는 “2003년 나온 <대장금>보다 더 오래된 우리나라 첫 퓨전 사극”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최완규·김이영 작가는 허준이 남긴 <동의보감>만 갖고 기록이 별로 없는 그를 풍부한 인물로 되살려냈다. 1975년 일일연속극 <집념>에서 허준을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후, 1976년 동명의 영화, 1991년 월화드라마 <동의보감>에 이어 <허준>이 나왔다. 이후에도 2013년 <구암 허준>이 등장하는 등 허준은 대중매체의 매력적인 소재였다. 그중에서도 <허준>은 사극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깨고 랩과 피아노 선율이 섞은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는 등 젊은 감각을 살려 화제를 모았다. “의학드라마이자 퓨전 사극이면서도 허준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무게감도 제대로 표현했다.”
종합병원 내과 의사들의 일상을 다룬 보기 드문 의학드라마였던 1994년 드라마 <종합병원>(문화방송)도 요즘 세대들이 다시 보기를 권했다. 전도연은 물론, 신은경, 구본승, 김지수 등 당시 인기스타들이 많이 출연했다. 2013년 드라마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티브이엔)은 방영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아 ‘탑골’ 자격이 주어지진 않지만 정 평론가는 “쫀쫀한 전개 등 연출이 섬세하고 내용도 흥미롭다”며 “만듦새가 좋은 드라마”라고 특별히 추천했다. 앵커 박선우(이진욱)가 20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 9개를 얻게 되면서 펼치는 타임슬립 드라마다.
■ ♣박상혁 예능피디 =
1. 순풍산부인과 2. 세 친구 3. 미스터큐 등 김희선 청춘물시리즈(그리고 <세계의 끝>)
1998년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스비에스)는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이미 인기 프로그램이다. <에스비에스>에서 자사 유튜브에 소개한 것이 입소문을 타며 10대들의 ‘탑골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김병욱 피디는 <한겨레>에 “30분 남짓의 짧은 시트콤에 매회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이를 한 가지 사건 위주로 편집하면 10~15분 정도 되기 때문에 요즘 유튜브에 잘 맞는 콘텐츠가 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강심장><섬총사> 등을 연출한 박상혁 <올리브채널> 피디는 “김병욱표 시트콤의 절정이었다. 김병욱표 시트콤은 당시의 유행어를 사용하거나 흐름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2000년 나온 시트콤 <세친구>(문화방송)도 재조명되기를 기대했다. 서른 한 살 된 남자 고등학교 동창생 세명이 한 집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당시로는 신선한 설정이 화제를 모았다.
박 피디는 “요즘은 잘 찾아볼 수 없는 풋풋한 청춘물의 유행을 이끌었던 ‘김희선표 시리즈’는 독보적인 스타와 드라마 속 소품이 유행되는 드라마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1998년 <미스터큐>(에스비에스)와 1999년 4월 <토마토>(에스비에스), 1999년 9월 <안녕 내 사랑>(문화방송) 등이다. “당시 티브이 주요 시청 층은 젊은 세대였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을 갖도록 연출했다. 주연도 청춘 배우들이 도맡았다.” 김희선이 드라마에서 하고 나온 곱창 밴드, 머리띠가 유행 아이템이 되는 등 드라마, 그리고 주인공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풋풋한 청춘물이 없는 요즘 세대들이 그 드라마를 보며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2013년 방영한 <세계의 끝>(제이티비시)을 덧붙이는 드라마로 추천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안판석 피디가 연출했다. 너무 생소해서인지 큰 주목을 못 받았는데 만듦새가 출중한 작품이다. 원인 모르는 괴질이 전염되는 과정에서 의사와 그 주변 인물이 겪는 고뇌를 다룬 재난 드라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했는데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등 실제로 바이러스가 화두에 오르며 재조명되기도 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소재로 하면서도 안판석 감독 특유의 인간을 성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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