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감독이자 작곡가 류재준. <한겨레> 자료 사진
“몸이 안 좋아져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네.”
22일 늦은 밤,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진 비보에 류재준 작곡가는 고개를 떨궜다. 그에게 전화를 건 이는 올해 86살인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그는 24일 내한해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과 함께 무대에 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령으로 이미 세계 투어를 서서히 줄여가고 있는 그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수년 전부터 내한을 추진해온 류 작곡가는 “펜데레츠키 선생도 너무 미안해하고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2017년 이후 2년 만에 방한하는 것만으로 화제를 모았던 펜데레츠키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의 곡이 한국에서 초연된다. 지난 22일 개막해 다음달 8일까지 이어지는 ‘2019 서울국제음악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26일 한국과 폴란드 수교 3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선보이는 ‘성 누가 수난곡―사람의 길을 묻다’와 ‘현을 위한 아다지오―교향곡 3번으로부터’다. 펜데레츠키가 1966년 3월 발표한 ‘성 누가 수난곡’은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겪어야 했던 시대적 아픔을 담은 곡이다. 모차르트 오페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지난해 개막작으로 연주되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2013년 9월 체코 필하모니에서 초연된 이후 이제껏 100회 넘게 연주돼왔다.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오푸스 제공
이 음악제의 예술감독인 류 작곡가는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인데 한국에서 한번도 연주된 적이 없다. 수년 전부터 선생께 한국 관객에게 직접 들려주기를 권했다”고 말했다. 류 작곡가는 “그분이 보기에 한국인과 폴란드인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과거의 비극을 넘어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이 곡이 한국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기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 펜데레츠키는 1992년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선율을 인용해 교향곡 5번 ‘코리아’를 작곡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26일 연주는 펜데레츠키를 대신해 그의 분신과 같은 마치에이 트보레크가 지휘봉을 잡는다.
펜데레츠키의 한국 초연곡 외에도 ‘2019 서울국제음악회’는 주목할 연주가 많다. ‘인간과 환경’을 주제로 4개 관현악 콘서트와 6개의 실내악 연주회로 진행된다. 25일 ‘홀로코스트’(일신홀)에서는 클라리네티스트 알렉산더 피터스타인과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시콥스키가 듀오 무대를 펼치고, 27일 ‘오래된 이야기’(예술의전당)와 29일 ‘새로운 세상에서’(롯데콘서트홀)에서는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신포니에타 크라코비아가 모차르트와 하이든을 위주로 연주한다. 류 작곡가는 “환경은 인간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희망의 씨앗을 뿌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주제와 관련된 공연을 선정해 각각 이름을 붙였다.
2009년 시작한 ‘서울국제음악제’는 펜데레츠키 같은 저명한 이들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활약하는 실력 있는 이들을 대거 소개해왔다. 올해는 22일 첫날 울려 퍼진 헝가리 오케스트라인 죄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버르토크 연주가 대표적이다.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이상으로 버르토크를 잘 해석하고 구현했다는 감상평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올해 예산이 75% 삭감되면서 지원금을 8천만원밖에 받지 못했다. 류 작곡가는 사비를 터는 등 고군분투하며 이 모든 악단을 국내에 불러들였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