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뉴스기획팀 기자 가곡은 가을에 유독 사랑받는 음악이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가곡의 밤’ 등 다양한 주제의 가곡 공연이 자주 열린다. ‘아 가을인가’ ‘산들바람’ 같은 가을 노래를 비롯해 ‘그리운 금강산’ ‘선구자’ 같은 한국 가곡의 대표곡들을 들을 수 있다. 올가을에도 어김없이 여러 가곡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전 해와 사뭇 다르다. 일제강점기 부역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작곡가 홍난파·현제명·김동진·조두남 등의 창작 가곡을 대하는 관객들 반응이 싸늘해졌다. 왜 친일 작곡가의 노래를 공연하느냐는 항의와 논란이 잇따른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고,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최근 한-일 관계마저 경색된 것이 배경이다. 지난 8~9월 가곡의 밤 행사를 두 차례 연 예술의전당은 ‘목련화’(김동진 작곡) ‘선구자’(조두남 작곡) 등을 연주했다가 뒤늦게 사과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친일 작곡가의 노래를 공연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일부 시민들의 항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은 “공연의 취지와 내용뿐 아니라 사회역사적 인식과 요구에도 더 엄격하게 관심을 갖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지난달 열린 가곡축제 ‘100인의 성악가가 부르는 100곡의 한국 가곡 르네상스’를 기획한 마포문화재단은 공연 전 친일 작곡가 노래를 선곡에서 제외했다. 탄생한 지 100년 가까이 된 한국 가곡을 되살린다는 취지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곡과 창작 가곡을 들려주는 공연이었으나 ‘봄처녀’ ‘봉선화’(모두 홍난파 작곡), ‘진달래꽃’ ‘가고파’(모두 김동진 작곡) 등 10여곡이 빠졌다. 한국 가곡 100년사에서 가장 많이 불린 가곡 10선에 들 만한 노래들임에도 경색된 한-일 관계를 의식해서다. 지난 3일 열린 세일음악문화재단의 ‘한국 가곡의 밤’ 공연에서도 친일 작곡가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친일 잔재 청산은 해묵은 논쟁거리지만 관객들한테서 어느 때보다 민감한 반응이 나오다 보니 공연계는 고민이 깊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며 친일 작곡가 노래를 부르자는 쪽과 불편해할 관객을 고려해 부르지 말자는 쪽이 엇갈린다. 논란이 거듭되면서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1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릴 예정인 ‘서독일방송 도르트문트 어린이합창단 초청 연주회’는 프로그램 공개 뒤 계획을 수정했다.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을 독일 어린이합창단과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이 함께 부르기로 했다가, 친일 선곡 지적이 나오면서 독일 합창단만 부르기로 한 것이다. ‘고향의 봄’은 독일 쪽에서 선정한 곡이다. 이미 여러 달 전부터 연습해온 터라 프로그램 변경은 어려운 상황이다. 공연계 한 관계자는 “해외 악단과 합창단이 내한공연 때 깜짝 앙코르로 한국 가곡을 부르거나 연주하는 일도 종종 있는데 이것도 미리 대비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취재하며 만난 성악가들은 친일 작곡가 노래라도 계승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 원로 성악가는 “가곡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처받은 우리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준 노래”라며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 찬양 음악을 만들었지만 독일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품어 안았던 전례를 생각해서 더 많은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 가곡은 노랫말 한 구절 한 구절로 우리 삶을 보듬어왔다. 작곡가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떠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하는 ‘봉선화’가 일제강점기 슬픔을 어루만지는 노래로 한몫을 했던 걸 부인할 수 없다. 친일 작곡가의 음악에 대한 고민이 어느 때보다 깊어진 이때, 성악가들을 포함한 음악계·공연계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공론화해보는 건 어떨까. 과거를 넘어 동시대를 껴안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가곡 장르가 우리 곁에 남아 사랑받으려면 한번은 거쳐야 할 단계로 보인다.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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