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편견 앞에서 굽힘 없어
스스로 ‘잡화가’라고 낮추기도
고바우 만화상 만들어 후진 독려
스스로 ‘잡화가’라고 낮추기도
고바우 만화상 만들어 후진 독려
가신이의 발자취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을 기리며
오밀조밀 작은 집들 사이 공터에서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다.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낫더래~” 단순하게 반복되는 고무줄놀이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내가 처음 고바우 영감을 만난 것은 이랬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팔던 <소년 동아일보>에서는 네 칸 유머 만화 <소케트군>을 보며 깔깔거리고,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보며 때론 감동도 받고 친구와의 우정을 고민하기도 했다. 중학교 선생님이 신문을 봐야 한다고 했을 때 어려운 기사들 사이에서 시사만화는 그나마 신문에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었다. <고바우 영감>을 즐겨 보며 세상사에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김성환 화백은 만화계에서 흔히 ‘고바우 선생님’으로 불렸다. 이천 년대 초반 광화문 어느 식당에 고바우 만화상 시상식 뒤풀이가 있었다. 어질러져 있던 테이블에서 만화계 어른들의 그림놀이가 시작되었다. 김성환, 박기정, 윤승운, 박수동, 이두호 등 내 어린 시절 영웅들은 종이 한장에 필담처럼 세필로 일필휘지를 하며 우아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물론 고바우 선생님의 재기 넘치는 한 획과 한마디 유머에 모두 두 손을 들었다. 엄숙한 시상식을 끝내고 시상자나 수상자 모두 아이처럼 낄낄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즐거워하던 그 풍경은 내겐 적잖이 충격을 줬다. 눈을 껌뻑거리며 보고 있던 내게 고바우 선생님은 “그러니까 평론이 중요한 거야. 이런 작가들 잘 감시하라고”라며 슬쩍 농을 던지시곤 다시 킬킬킬 웃으셨다. 이런 것이 만화구나!
뛰어난 그림 실력과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해학적인 표현이 넘치셨던 고바우 선생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존경의 수식을 붙였지만 정작 선생님 스스로는 잡화가라는 말로 낮추셨고, 고뇌에 찬 작업과정을 칭송할라치면 ‘그림은 그냥 생활이다’라며 일축해 버리셨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스스로에게 집중하셨고 권력과 편견 앞에선 굽힘이 없으셨다. 절대 권력과 홀로 대적해야 했던 시사만화가로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것은 자존감이었다. 저작권이 없던 시절에도 저작물에 대해 철저히 권리주장을 하셨기에 다수의 작품집을 남기셨고, 수많은 수집과 기록을 다수의 저작으로 남기셨다. 이 모든 것은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하셨기에 가능했다.
고바우 선생님은 ‘최초’ 기록이 많다. <고바우 영감>은 총 1만4139회 연재로 한국 최장수 연재만화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고바우’ 단일 캐릭터로 박사 논문 연구대상이었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발행하는 만화신문을 만들었고, 현대만화가회, 시사만화가회 등 만화가들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고바우영감> 만화 원고가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으며, 만화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가장 많은 필화사건을 겪기도 하셨다. 1957년 ‘7.27 데모사건’, 1958년 ‘경무대똥통사건’ 풍자 만화로 벌금형을 받고, 중앙정보부에 2번, 검찰에 2번 끌려갔으며 1966년부터 1978년 사이에는 250편이 삭제 수정되었다. 당신이 직접 사재를 털어 ‘고바우 만화상’을 제정하여 후배 만화가들을 독려하였다.
20세기 한국사회의 증인이자 기록자이자 벗이었던 고바우 선생님은 이제 떠나셨다. <고바우 영감> 마지막 회에 춘풍추우(春風秋雨)라고 하신 말씀이 추적거리는 가을비와 함께 허허롭기 짝이 없다.
백정숙 만화평론가
연재가신이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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