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잡는 명절 예능프로그램들 사이 우뚝 솟은 드라마가 반갑다. 명절 특집 드라마는 연휴의 백미였는데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가 몇해 전부터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올해는 내용도 진지하고 울림도 크다. 일제의 강제징용, ‘위안부’ 동원 등 근현대사를 담은 <한국방송2>(KBS2) 특별기획 드라마 <생일편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데다 한-일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생일편지>는 한국인들이 아파하는 역사적 상처의 지점을 정면으로 짚는다. 2부작으로 11일(1부)에 이어 12일(2부) 밤 10시에 방영한다.
드라마는 91살 김무길이 어느 날 잊지 못할 첫사랑한테 생일 편지를 받은 뒤 1945년 히로시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손녀에게 들려주면서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말미부터 광복을 거쳐 한국전쟁까지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청춘 시절을 조명하는데, 이뤄지지 않은 애틋한 사랑에 굴곡진 시대 배경이 더해져서인지,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만 봐도 가슴 한편이 저릿하다.
일제강점기 17살의 김무길은 징용을 자처한다. 허약한 형을 대신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고향 합천에서 사랑을 키웠던 17살 소녀 여일애가 히로시마에서 술집 허드렛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실은 혹독했다. 김무길은 일본인 관리자에게 폭언과 구타를 당하고 심한 모멸감 속에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여일애는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을 겪는다. 1945년 히로시마에서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지지만 시대는 그들을 그냥 사랑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드라마는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 사건을 ‘리얼 고증’했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장면도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동안 원폭 피해는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에 비해 상세히 다뤄지진 않았다.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재일 한인 7만명이 피폭됐다. 이 중 사망자는 4만명에 이르렀고, 재일 한인의 사망률은 전체 피해자 평균 사망률의 두배 가까이 된다.
배수영 작가는 최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기록하고 싶었다. 증언이 기록으로 남았기에 그 시절을 내가 겪지 않았으나 생생히 와닿았다”며 “그 시절을 버티고 희생하며 살아남은 분들의 헌사이자 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김정규 피디는 “드라마적 차원에서 접근해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에너지를 주기 위해서 제작했다”고 말했다.
17살 소년 소녀를 연기한 송건희와 조수민 등 젊은 배우들도 소회가 각별했다. 송건희는 “내가 그들의 아픔이나 시대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달하고 싶었다. 조심스러운 부분일 수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할 역사를 드라마화한 것이기에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보통 드라마를 제작할 땐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중견 연기자들이 나오는 장면을 줄이는 경향이 있는데, <생일편지>는 ‘노장’들의 연기력이 작품을 탄탄히 채운다. 전무송이 할아버지 김무길로 나온다. 문보현 드라마센터장은 “수익성이 중요한 지표가 되면서 진정성 있는 드라마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데, 실향민, ‘위안부’ 등 일제강점기 소재를 녹인 작품을 계속해서 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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