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팀 선임기자 “욕하면서도 매번 보게 되는 막장드라마 같습니다.” 문화재학계의 한 중진 연구자는 진저리를 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숨겨둔 경북 상주의 고서업자 배익기(56)씨 발언에 최근 언론이 연일 집중보도를 쏟아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해례본은 15세기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 뒤 글자를 만든 원리를 설명한 문서 유산이다. 배씨는 판본을 숨겨놓고 국가와 국민을 상대로 1천억원대 흥정을 주장하며 수년째 신경전을 벌여왔다. 그럼에도 방송 등 언론매체들이 생중계 인터뷰까지 하며 그의 주장을 앞다퉈 소개하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배씨가 경북 상주에서 처음 공개해 이름 붙여진 ‘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는 세상에서 배씨만 안다. 배씨는 2008년 7월 국보 지정을 위해 처음 언론에 공개했으나 한달 뒤 골동상 ㅈ씨가 자기 가게에서 배씨가 훔쳐간 장물로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해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대법원은 2011년 6월 소유권자를 ㅈ씨로 확정했고 ㅈ씨는 이듬해 실물이 없는데도 소유권을 문화재청에 넘기는 ‘해괴한 기증식’을 하고 연말 숨졌다. 배씨는 절도 혐의로 옥에 갇혔으나, 2012년 9월 항소심 무죄가 선고돼 풀려나온 뒤 2015년부터 1천억원을 주면 상주본을 내놓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그는 2017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숨겨놓았던 상주본 일부가 불타 훼손된 사진을 공개해 충격을 안겼다. 한글의 정체성을 담은 지고의 문화유산을 볼모로 잡고 벌어진 10여년 공방은 숱한 의혹과 갈등을 빚었다. 국가를 겨냥한 흥정 요구는 보도될 때마다 무수한 댓글이 달리고, 포털 검색어 상위 순위에 오르며 대중의 공분을 자아냈다. 지난달 15일 대법원의 판결 이후에도 비슷한 양상이 재현됐다. 배씨가 2년 전 문화재청을 상대로 상주본의 강제 회수 집행을 못하게 해달라며 낸 이의신청에 패소 판결을 내린 것으로, 국가 소유권을 사실상 확정한 판결이다. 하지만 언론은 판결 자체보다 이에 대한 배씨의 생각과 근황에 주력한 집중인터뷰, 현장속보 등을 쏟아냈다. 일례로, 15일 저녁 방송된 <제이티비시>의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배씨를 생방송으로 연결해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상주본이 잘 있는지를 캐물었다. 배씨는 기세등등했다. “지금 상황이 이런 만큼 더더욱이나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잡아뗐다. 31일 <시비에스> ‘김현정의 뉴스 쇼’에서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안민석 의원(더불어민주당)까지 나와 현장 연결된 그에게 상주본 상황을 질문했으나 “있다 없다 이런 말조차도 더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국가명예관장 추대 등 안 의원의 중재안에는 시큰둥한 채 애초 평가했다는 감정액 1조원의 10분의 1인 1천억원을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국가가 소유권을 빼앗아갔고, 자신은 결백을 위해 관과 싸운다는 메시지만 줄곧 강조했다. 언론이 검증은 못하고 멍석만 깔아준 격이었다. 법률적으로, 배씨는 일급 문화재를 불법점유한 잠재적 범법자다. 국가 소유로 공인된 해례본을 숨겨놓고, 감정평가를 위해 내놓으라는 공식 요청에 응하지 않아 언제든 고발될 수 있다. 이런 그를 유명 앵커가 존칭을 쓰며 하소연을 들어주고, 국회의원까지 방송에 나와 중재안을 협상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국민적 관심사이니, 보도는 당연하다. 하지만 법률상 불가능한 거액을 요구하고, 명예회복 진상조사 등 실체도 모호한 주장을 늘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언론이 받아 들려주는 데 치중하는 것은 문제다. 언론들이 ‘배익기의 확성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고서적 전문가 ㄱ씨는 “배씨는 설 자리가 없는 상황이다. 스스로 판단해 정부와 원만히 협상하고 해례본을 빨리 넘겨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인데 과잉보도로 배씨 스스로 영향력 있다고 오판할 여지를 주고, 협상 진척을 늦추는 역효과까지 불거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