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벳부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 인 서울’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를 끝내고 웃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얼마나 우스운 동물인가! 예술가라 할 테지!”
공연 해설가인 아니 뒤투아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피아니스트 악장을 낭독했다. 그가 어머니이자 ‘전설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78)의 풍성한 백발을 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생상스가 여러 동물을 장난스럽게 묘사한 ‘동물의 사육제’ 14악장 중 열한번째 악장은 재능은 없으면서 권위를 누리려 하는 피아니스트를 비웃는 듯한 연주와 내용이 포함돼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형편없는 연주자처럼 대하는 딸 뒤투아의 모습이 재밌는지 피아니스트 임동혁(35)이 활짝 웃었다.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2019 벳부 아르헤리치 뮤직 페스티벌 인 서울>로 9년 만에 내한 공연을 한 아르헤리치는 페스티벌답게 1부 공연을 유쾌하게 이끌었다. 벳부 페스티벌은 올해로 21번째를 맞았는데, 아르헤리치는 1996년부터 이 축제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둥글게 둘러앉은 아르헤리치와 임동혁,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자들은 배우이자 공연 연출가인 뒤투아의 낭독에 맞춰 연주하며 연기를 선보였다. ‘암탉과 수탉’ 연주 땐 암탉으로 변한 퍼커션 연주자가 알을 낳았고, ‘거북이’ 연주 땐 거북이처럼 한없이 느린 연주가 졸린다는 듯 연주자들이 하나둘씩 잠이 들었다. 어린이 공연의 단골 레퍼토리인 ‘동물의 사육제’에 어른들이 홀리듯 빠져들었다.
아르헤리치는 40대부터 다양한 연주자들과 함께하는 실내악 연주나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에 주로 서고 있다. 그는 늘 ‘젊은 아티스트를 후원하는 일이 나의 음악 활동 중 대단히 중요하다’고 밝혀왔는데 임동혁과의 만남도 그랬다. 임동혁이 17살 때 참여한 부소니 콩쿠르의 심사위원이던 아르헤리치는 음반사인 이엠아이(EMI·현재 워너클래식스)의 ‘아르헤리치 추천’ 시리즈에 임동혁을 선택해 데뷔 음반을 낼 기회를 제공했다. 그때 낸 음반이 2001년 프랑스 최고음반상인 ‘황금 디아파종상’을 수상하며 임동혁이란 이름이 세계 무대에 알려졌다.
두 사람은 최근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을 협연해 담은 음반을 내기도 했다. 임동혁의 첫 라흐마니노프 앨범이자 아르헤리치와의 협연곡을 처음 수록한 앨범이다. 지난 2월 독일에서 아르헤리치를 만났다는 이지영 음악 칼럼니스트는 “아르헤리치가 지난해 함부르크에서 이 곡을 임동혁과 연주했는데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여러 번 연주했지만 리미(아르헤리치가 임동혁을 부르는 애칭)와 연주한 버전이 최고였다’며 흡족해했다”고 전했다.
단연 이번 서울 공연의 하이라이트도 2부의 ‘교향적 무곡’이었다. 두 대의 피아노를 마주 놓고 앉은 두 사람은 아련하고 음울한 선율로 라흐마니노프의 생애 마지막 작품을 연주했다. 임동혁이 젊은 패기로 격정적인 연주를 했다면 여든을 앞둔 아르헤리치는 손이 건반 위를 날아갈 듯 가볍게 연주하며 거장다운 여유와 기량을 보여줬다. 이지영 칼럼니스트는 “아르헤리치는 임동혁의 호흡, 프레이징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며 그를 아꼈는데 이를 입증하듯 두 사람이 서로를 짓누르지 않고 완벽한 호흡으로 더할 나위 없는 연주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연주를 끝낸 아르헤리치와 임동혁은 손을 꼭 잡고 무대를 한 바퀴 돌며 인사했다. 43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20년 가까이 맺은 인연이 무대 위에서 따뜻한 기운을 발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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