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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악보 통째로 외우는 ‘암보’, 세계적 지휘자들의 암기법은?

등록 2019-04-28 18:26수정 2019-04-29 17:43

악보 암기를 둘러싼 지휘자들의 세계
악보 통째 외워서 지휘하면
시선 악보에 빼앗기지 않고
페이지 넘기는 수고도 줄여
‘곡에 통달’ 신뢰감 심어줘

연주자들은 몸으로 기억하고
지휘자들은 사진 찍듯 기억
핸드북 만들어 들고다니며 암기도
‘암보 천재’ 토스카니니 실수 뒤 은퇴

악보 놓고 고집하는 유형
혹시나 까먹을 경우 대비해
심리적 안정 기하려 펼쳐놓거나
보여주기식 과시 경계하려는 뜻도

교향곡은 암보 지휘 많이 하지만
오페라·협주곡은 악보 놓고 지휘
암보 여부가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나 전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자들에겐 스트레스 요인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클라우디오 아바도, 정명훈, 로린 마젤, 요엘 레비. <한겨레> 자료사진
암보 여부가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나 전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자들에겐 스트레스 요인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클라우디오 아바도, 정명훈, 로린 마젤, 요엘 레비. <한겨레> 자료사진
악보는 지휘자에게 ‘바이블’과 같다. 지휘자는 악보를 보며 곡을 분석하고 재창조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데 수백번 수천번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악보를 외우기도(암보) 한다. 독일 명문 악단 드레스덴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미하엘 잔덜링은 “악보는 작곡가가 피땀 흘려 새긴 유언”이라며 “지휘자는 작곡가가 남긴 음표와 쉼표, 여백까지 탐구해 음악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내한한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은 지휘자 주빈 메타(83)도 음악과 하나 된 모습을 선보였다. 그는 이날 약 50분 길이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고급스러운 음색과 풍부한 사운드로 펼쳐내 큰 박수를 받았다. 놀라운 건 이 곡을 암보해 지휘했다는 점이다. 지팡이를 짚고 등장할 만큼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고, 나이 들수록 떨어지는 게 기억력이라는데 그는 이 곡을 어떻게 외웠을까? 악기를 연주하며 손의 감각으로도 외운다는 연주자들과 달리 지휘자들에겐 특별한 암기법이 있는 걸까?

■ ‘머슬 메모리’와 ‘포토그래픽 메모리’
지휘자는 연주에 앞서 악보를 입수해 곡의 형식, 주제, 화성 등을 분석하고 악단과 함께 리허설을 하며 자신의 해석을 악단이 완벽하게 연주할 때까지 연습시킨다. 이 과정에서 저절로 되는 게 암보다. 암보를 하게 되면 시선을 악보에 붙잡히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신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정치용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지휘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암보를 할 만큼 악보를 공부하라는 의미로 암보를 강조하기도 한다”며 “반복적으로 연습하다 보면 저절로 되는 게 암보”라고 했다.

지휘자에게 암보는 당연한 것도, 대단한 것도, 꼭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적잖은 스트레스 요인이긴 하다. 암보를 하면 청중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저 지휘자는 악보를 외울 정도로 곡에 통달한 사람’으로 보여져 일종의 신뢰감을 줄 수 있어서다. 최수열 부산시립교향악단 지휘자는 “지휘자들치고 암보 스트레스를 안 받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웃었다.

그렇다면 연주자와 지휘자의 암보법은 뭐가 다를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백윤학 지휘자는 연주자와 지휘자의 기억법을 각각 ‘머슬 메모리’(몸으로 기억하기)와 ‘포토그래픽 메모리’(사진 찍듯 기억하기)로 설명했다. “피아노 등 악기 연주자들은 연주를 계속하다 보면 손이 익어서 저절로 연주해요. 그런데 지휘자는 접촉하는 악기가 없다 보니 악보 페이지를 사진 찍듯이 외워버리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로린 마젤, 클라우디오 아바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의 지휘자가 이렇게 악보를 암보해 무대에 서는 유형이다. 요엘 레비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 지휘자도 모든 무대를 암보해 연주한다. 요엘 레비는 “악보를 외우면 연주자들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다”며 “나의 재능 중 하나인데 총보(모든 악기의 악보를 종합한 것)를 보면 저절로 음악이 흘러간다”고 했다.

최수열 지휘자도 모든 무대를 암보해 서진 않지만 되도록 암보해 무대에 서려고 노력한다. 그 역시 사진 찍듯이 악보를 외우는 스타일이다. “연주하면서 머릿속 악보를 넘기는데 그러다 보면 6살 딸이 악보에 남긴 낙서까지 떠오르게 된다”고 했다. 악기 전공자거나 작곡가였다가 지휘를 하는 이들은 구조적인 틀에서 악보를 분석해 외운다. 오케스트라곡은 축약해 피아노로 쳐볼 수 있는데 보통 4성부(멜로디 파트나 하모니 파트같이 선율과 화음을 이루는 개별 라인)로 나눠 그 안에서 흐름이나 논리를 외울 수 있다. 백 지휘자는 “악보를 외우려면 자주 쳐다보고, 음악을 많이 듣고 수없이 머리로 연주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 역시 악보를 핸드북 사이즈로 작게 만들어 다니며 수시로 들여다본다.

요엘 레비의 KBS관현악단 지휘 모습. 한국방송 제공
요엘 레비의 KBS관현악단 지휘 모습. 한국방송 제공
■ 암보하려면 토스카니니처럼
악보 없이 연주하면 음악에 더 몰입할 수 있다. 일단 작품을 외우고 나면 연주자들에게 필요한 주문을 한 다음 어디서 다시 시작할지 악보를 뒤질 필요가 없다. 공연 직전 특정 음을 연주하는 키가 고장나 당황하는 클라리넷 연주자를 보고 ‘암보 천재’ 토스카니니가 “오늘 연주할 곡에서 그 음은 나오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단원을 안심시켰다는 이야기는 암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다. 윌슨 응 서울시향 부지휘자는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연주자들과의 소통인데 암보가 도움을 준다”며 “식사할 때, 이동할 때에도 악보를 보는 저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새로운 작품과 ‘연애중’이라고 할 수 있다”고 웃었다.

물론 지휘자들이 모든 연주곡을 암보하는 것은 아니다. 교향곡은 암보로 많이 하지만 협연자와의 호흡이 중요한 협주곡, 연주법이 복잡한 현대음악, 노래에 연주를 맞춰야 하는 오페라나 합창곡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악보를 보면서 지휘한다. 자주 연주하며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는 지휘자의 ‘시그니처’ 곡은 어떨까? 지난달 엘에이(LA) 필하모닉과 내한한 구스타보 두다멜은 그가 100번도 더 연주했다는 말러 ‘교향곡 1번’을 암보로 연주하며 그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윤이상 작곡가의 ‘예악’을 자신의 시그니처 곡으로 만들고 싶다는 최수열 지휘자는 이 작품을 연주할 땐 반드시 악보를 놓고 지휘한다. “연주를 마치면 지휘대의 악보를 접어 청중에게 악보 표지에 적힌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보여준다. 이 곡이 난해하든 쉽든 간에 연주를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이 작품을 창조한 작곡가를 드러내고 싶어 이렇게 한다”고 설명했다.

■ 암보는 선택일 뿐, 악단과의 호흡이 중요
반면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 것을 고집하는 이들도 있다. 마리스 얀손스, 게오르그 숄티, 리카르도 무티 등은 악보를 꼭 펼쳐놓고 지휘하는 유형이다. 암보를 하고도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악보를 보면대에 놓고 지휘하기도 한다. 연주하는 동안 객석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식으로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일이 발생하면 다음에 연주할 음표가 떠오르지 않아 연주를 망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암보 능력을 너무 믿었다가 악단에 대한 통제력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완벽한 암보를 자랑했던 토스카니니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었는지 87살이던 1954년 4월에 열린 바그너 음악회에서 오페라 <탄호이저>를 지휘하던 중 일시적 기억장애로 잠시 ‘멍을 때려’ 연주회를 망치기도 했다. 그날로 토스카니니는 더 이상 공개 무대에 서지 않고 은퇴해 버렸다.

암보가 음악적 완성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암보하는 지휘자에 대한 신뢰도를 높게 보는 청중들의 태도가 지휘자들의 암보를 ‘과시용’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 음악평론가는 “꽤 많은 애호가들이 암보를 하면 더 치열하게 음악에 접근한다고 본다. 음악이라는 게 참 추상적이라 그런 신뢰감을 가지고 들으면 이 지휘자는 음악을 잘하는구나로 들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국 청중들이 유난히 암보에 예민하다는 건 요엘 레비도 느낀다. “저에게 어떻게 모든 곡을 외워서 하느냐는 한국 팬들의 질문이 유독 많다”고 했다. 백 지휘자 역시 “암보를 하면 그 자체로 이슈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국어책 외우듯이 기계적으로 외워 ‘보여주기식’ 암보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며 “이럴 경우 청중에게 감흥을 주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수십개의 악기가 동원되는 복잡한 음악을 외워서 음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연주해내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암보는 음악의 본질을 전하는 데 중요한 게 아니다. 정 지휘자는 “지휘자는 암보랑 상관없이 악단의 실력에 맞춰 연주의 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며 “암보에만 매달리는 게 제일 나쁘다”고 말했다. 최 지휘자도 “암기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게 아니잖나. 악단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암보를 하고 안 하고는 지휘자의 스타일일 뿐 암보 자체로 연주력을 평가해선 안 된다. 허명현 클래식평론가는 “빠르게 암보하는 능력은 분명 테크닉 중 하나지만 지휘자가 곡을 암보했는지 안 했는지가 실제로 곡을 지휘하는 데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며 “암보 여부가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나 전문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고 무대에서 아이디어의 손실 없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음악을 제시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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