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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우리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마라

등록 2019-04-21 14:14수정 2019-04-21 22:30

[연극 ‘7번국도’]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군 의문사
피해자와 남겨진 이들 들여다봐
모성·가족 서사 벗어난 인물 설정
현실 훑은 대사가 묵직한 메시지로
연극 <7번국도>.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이강물
연극 <7번국도>.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이강물
연극 <7번국도>는 강원도 속초 7번국도를 달리던 동훈의 택시에 군인인 주영이 타면서 시작된다. 경기도 수원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딸이 죽은 동훈과 군 의문사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주영의 이야기를 섞은 연극은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사건’과 ‘군 의문사’ 문제를 시간의 순서를 섞어 교차시키면서 희생된 피해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딸을 잃고 시위하는 엄마 동훈과 이를 말리는 아빠 민재, 동훈과 함께 1인시위를 하다 그만두는 또 다른 공장 피해자의 누나 용선, 군인 주영과 여자친구 기주 이렇게 다섯 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가족끼리, 피해자들끼리, 서로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여러 층위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에서 <7번국도>의 구자혜 연출과 배해률 작가를 만났다.

백혈병 사건과 군 의문사를 어떻게 엮게 됐을까. “속초에서 군 생활 할 때 우연히 삼성 백혈병 사건 피해자 황유미씨 아버지의 투쟁을 다룬 기사를 봤어요. 그 시기에 군 의문사 이슈도 있어서 두 사건이 마주쳤을 때 어떤 함의를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배해률)

두 사건의 피해자가 연대하고 치유하는 내용이었던 초고는 2년간의 작업을 거치며 많이 달라졌다. 애초 설정에 아버지였던 동훈은 어머니로, 주영의 어머니였던 기주는 여자친구로 바뀌었다. 배 작가는 “피해자들의 일상을 짐작하며 쓰다 보니 초고의 인물들은 전형성이 짙었다. ‘모성’이란 프레임에 갇혀 있기도 해 연출가의 제안에 따라 성별 설정을 바꿨다”고 했다. “사회문제에 전면으로 나서는 인물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어도 서사가 흔들리지 않더라고요. 또 어머니 피해자들이 만나게 되면 가족서사로만 읽힐 수 있어 한쪽을 (피가 섞이지 않은) 여자친구로 설정한다면 관객들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구자혜 연출가는 실존하는 참사 피해자를 다루는 만큼 연극이 만드는 ‘환영’을 경계했다. “동훈과 달리 먼저 싸움을 그만둔 민재에게 용선이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장면이 있어요. 민재는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 관객들은 용선의 입장에서 민재를 바라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관객들이 각 인물의 성격을 스스로 이해할 사이(시간)를 주도록 배우들에게 공유했어요.”

연극 <7번국도>.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이강물
연극 <7번국도>. 사진제공 남산예술센터 ⓒ이강물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연극은 대사 하나, 장면 하나가 다 의미심장하다. 딸을 잃고도 씩씩하게 사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말을 들었던 동훈은 주영의 영향으로 피켓을 내려놓고 싸움을 멈춘다. 그러곤 남자친구를 잃은 기주에게 “죽은 사람이 그런다고 돌아오냐,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보인다”며 1인시위를 말린다. “그 정도면 됐다” “작작해라” 같은 얘기를 지겹게 들었을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에게 건네는 말의 무게는 같고도 다르다.

배우들은 서로를 마주 보기보단 객석을 향해 서서 고함치며 대사를 거칠게 뱉는다. 마치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품었던 분노를 세상에 표출하는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해 구 연출가는 “화를 내는 건 아닌데…”라고 머쓱해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사적 대화로 좁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동훈이 죽은 딸을 위해 ‘공적 발화’를 하는 장면이 있어요. 공장에 다녔다는 이유로 죽어도 되는 게 아니라는, 계급과 죽음은 상관없다는 얘기를 엄마가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하다 보니 소리가 커지는 식이죠. 말의 힘을 담는 게 목표였어요.”

피해자들은 누군가에 맞서 싸울 수 있고, 싸움을 멈출 수도 있다. 이 연극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피해자다운’ 모습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구 연출가는 “동훈의 성별을 바꿔 택시를 몰게 하고, 큰 목소리를 내며 피켓을 드는 시위대의 전형성을 뛰어넘도록 하는 게 ‘피해자다움’을 넘어가는 선행 단계라고 봤다”며 “일반적으로 군대에서 어떤 병사가 괴롭힘을 당하면 분명히 ‘샤이’(겁 많고 수줍음)할 거라고 생각하잖나. (주영이 그렇지 않듯) 등장인물들이 그런 식의 성별·직업 등을 벗어나 발화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배 작가도 “애도하는 모습, 싸우는 모습, 연대하는 모습, 그 안에서 갈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어떨 것이라고 당연하게 규정하는 태도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개막일에 공연을 봤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보는 내내 먹먹했다. 우리 안에 채 꺼내지 못한 마음들이 깊이 담겨 있었다”는 후기를 에스엔에스(SNS)에 남겼다. 28일까지 남산예술센터. (02)758-2150.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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