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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고향의 낙엽은 더 붉다고 하셨던 스승 윤이상…내 음악의 뿌리”

등록 2019-03-31 17:02수정 2019-03-31 20:41

통영국제음악제 찾은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

윤이상과 부자같이 각별했던 수제자
스승 빼닮은 동서양 음악 융합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 선보여

“어긋난 길 갈 땐 엄격했던 선생님
고향에 모셔든 유해…감회 남달라”
일본 현대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일본 현대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출렁이는 밤바다에 한 여인이 떠밀려온다. 늙은 소나무가 서 있는 해안가에서 정신이 든 그는 중동 출신의 난민 헬렌. 밀항 중 남동생을 잃은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슬픔에 빠진 그의 앞에 일본 헤이안 시대 혼령인 시즈카 고젠이 나타난다. 헬렌을 돕고 싶다는 시즈카는 헬렌에 빙의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궁정 무희였던 시즈카는 연인인 사무라이와 그의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시즈카와 헬렌은 일본어와 영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나누며 서로의 아픔을 위로한다. 동서양의 두 여인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이 작품은 단막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이다. 지난 29일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에 선보였는데 작곡가 윤이상의 수제자인 일본 현대음악가 도시오 호소카와(64)의 작품이다. 2017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됐고, 이번 무대가 아시아 초연이다.

<바다에서 온 여인>은 일본 전통 가무극 ‘노’의 대표작인 <후타리시즈카>를 성악과 섞어 재해석했다. 절제된 느린 음악과 춤을 보여주는 노의 전통에 기반을 둔 무대는 벨기에 연출가 토마스 이스라엘의 감각적인 비디오아트를 만나 이질적이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일본 악기를 쓰지 않고도 동양적인 느낌이 나는 음악은 동서양의 음악기법을 융합시킨 스승 윤이상의 음악을 쏙 빼닮았다. 오페라 시작 전 별개의 연주곡으로 들려줬으나 마치 서곡 같았던 ‘여정 Ⅴ’는 플루티스트 김유빈이 플루트로 마치 대금 같은 소리를 연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오페라 공연에 앞서 취재진을 만난 호소카와는 “노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혼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비극을 노라는 형식과 서구의 현대음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내 뿌리는 스승의 음악”이라며 “서구의 음악이 딱딱 끊어진다고 하면 동양의 음은 이어지며 살아나고 사라진다. 붓글씨에 비유하면 선을 그릴 때 굵어졌다 얇아졌다 하듯이 끝없는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동서양을 넘나드는 작품 활동으로 현재 일본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호소카와는 19살이던 1974년에 윤이상을 처음 만났다. 일본에서 열린 대규모 연주회에서 윤이상을 보고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976년에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에 입학해 7년간 윤이상을 사사했다. “스승님은 마음 깊이 나오는 음악이 아닌 기술적인 음악을 싫어했어요. 굉장히 엄격하셔서 일주일에 한번씩 레슨 받을 때 작곡을 많이 해서 가져가면 ‘이거 아냐’라며 내던지셨죠. 직감적으로 (마음이 담긴 음악인지 아닌지) 아셨던 것 같아요. 저는 좋은 학생이었으나(웃음) 어긋난 길을 갈 땐 엄격하셨죠. 스승님과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일본과 독일을 오가며 자주 교류했어요. 스승님이 안 계셨다면 전 작곡가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윤이상의 베를린 자택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는 그는 스승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에 비유하며 깊은 존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스승님은 고향 통영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집 근처를 같이 산책할 때 붉게 물든 낙엽을 보고 고향의 낙엽은 피처럼 더 붉다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스승님 부부가 투어 공연을 떠나 오래 집을 비우면 제가 고양이들 밥을 챙겨주기도 했어요.(웃음)”

호소카와의 통영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다. 2012년에 음악제 초청으로 처음 이곳을 찾아 ‘후쿠시마와 쓰나미 희생자들을 위하여’를 초연했는데 올해 방문은 더 의미가 깊다. 지난해 윤이상의 유해가 음악당 뒤뜰에 안장됐기 때문이다. “통영은 스승님이 늘 그리워한 고향이라 감회가 남달라요. 처음 왔을 땐 이 음악당도 없었죠. 이번에 와서는 선생님이 모셔진 묘소도 찾아봤어요. 저녁때 이수자 여사(윤이상의 아내)님을 뵙기로 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스승 윤이상의 묘소 앞에 선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스승 윤이상의 묘소 앞에 선 작곡가 도시오 호소카와.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은 현대 음악가였던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등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다 1969년 독일로 추방된 뒤 한번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 호소카와는 “저는 스승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정치적 이슈에 연루돼 있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올해 호소카와의 다양한 작품을 연주해 들려준다. 가장 관심을 많이 받은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에 이어 오는 3일과 4일에는 현대음악 전문 현악사중주단인 아르디티 콰르텟이 호소카와가 작곡한 꽃을 소재로 한 ‘개화’, 독일 낭만주의 시에서 영향받은 ‘파편 Ⅱ’ 등을 연주한다. 7일에는 홍콩 뉴 뮤직 앙상블이 생명의 탄생을 담은 ‘드로잉’(한국 초연)을 공연할 예정이다.

후쿠시마 대지진, 난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음악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그는 “<바다에서 온 여인>을 파리에서 의뢰받아 만들 당시 유럽에 난민 이슈가 불거졌는데, 단지 유럽이 아닌 전세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며 “음악가도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는 자연이다. “바다에 관한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 중인데 그래서 통영이 더없이 좋아요.” 눈감는 날까지 스승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바다. 제자 역시 그 통영 바다에 푹 빠진 듯 보였다.

통영/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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