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흙방울’ 스토리텔링…위험한 가야사

등록 2019-03-27 18:12수정 2020-12-27 18:04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결정적 증거·학계 검증도 없이
“김수로왕 신화 관련 유물” 발표
국정과제 ‘가야사 재조명’ 과열 양상
미지의 선각 그림이 새겨진 1500년전 대가야시대의 흙방울.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의 작은 석곽묘에서 나왔다. 지난 20일 고령 대가야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될 때 모습이다.
미지의 선각 그림이 새겨진 1500년전 대가야시대의 흙방울.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의 작은 석곽묘에서 나왔다. 지난 20일 고령 대가야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될 때 모습이다.
1500년 전 경북 고령에 있던 대가야국 장인은 흙방울을 정성껏 빚어 5살도 되기 전 숨진 아이의 무덤에 묻어주었다. 이 흙방울의 실체는 무엇일까? 장난감인가, 제사유물인가? 그림 표면에는 선으로 새긴 오묘한 여섯 가지 그림들이 있었다. 그림들의 정체는 또 뭘까?

지난 20일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에서 공개된 대가야 흙방울을 놓고 계속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유적을 발굴한 대동문화재연구원은 <구지가>로 대표되는 가야 김수로왕 건국신화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낸 유물이라는 주장을 제기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직경 5cm의 방울에 새겨진 그림들을 현미경 등으로 관찰해보니 거북의 등무늬(귀갑)와 관모를 쓴 남자, 사지를 활짝 펴며 춤추는 여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상자로 해석된다는 견해였다.

발표 직후 학계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성급하고 무리한 발표일 뿐 아니라 역사 왜곡에 가깝다는 반발까지 터져 나온다. 발굴한 지 열흘도 안 지났고 학계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발표한 과정도 석연치 않다. 며칠 전 만난 한 소장 고고학자는 “사실상 역사를 창작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단언했다.

지금껏 발굴된 가야 유물에 그림이 나온 사례는 매우 희소하다. 합천 반계제 고분군에서 사람 얼굴 모양으로 새김한 청동 말방울이 나왔고, 지산동 고분 출토품 가운데 귀신 모양의 상을 새긴 화살통 장식이 나온 적 있지만, 선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그린 사례는 전무했다. 반면 신라 토기엔 그림이 새겨진 사례가 꽤 많다. 사람 얼굴이나, 말 탄 사람 등 다양한 그림들이 토기에 선으로 그려졌다. 토우가 붙어 있는 대형 토기들도 유명하다.

지난 20일 열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 설명회. 흙구슬이 나온 작은 석곽묘를 조사원이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지난 20일 열린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발굴 현장 설명회. 흙구슬이 나온 작은 석곽묘를 조사원이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가야의 색다른 그림이 다수 확인된 건 소중한 발견이다. 문제는 그것이 가야만의 신화적 이미지냐는 의문이다. 흙방울에 나온 도상은 신라 토기 그림은 물론 고구려·백제·일본의 유물에 나타난 이미지들과 상당수 비슷하다. 대동연구원 쪽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으로 풀이한 납작한 모양새의 동물 혹은 인물상은 신라 토기에서 종종 보이는 마각상(말의 모습을 새긴 것)의 전형적 모습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지난 20일 현장설명회에 온 이희준 경북대 명예교수와 이영식 인제대 교수도 이를 지적했다. 춤추는 여성이라고 주장한 도상도 고구려 벽화 등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개구리나 두꺼비 상(금와상)에 가까우며 일본 후쿠오카 반츠카 고분군 등에도 비슷한 도상의 조형물들이 나왔다. 연구원이 건국신화의 핵심 근거로 해석한 거북등 무늬도 가야만의 것이 아니다. 신라의 금동신발판 바닥과 백제 무령왕릉의 두침(베개) 등에선 더욱 정연하게 나타나는 조형 요소다. 즉, 이 흙구슬 문양의 의미는 가야인들이 신앙과 이상, 현실의 삶과 의식세계를 표현하는 데 고대 동아시아 공통의 이미지 요소들을 사용했을 가능성이다.

2년 전 가야시대사 재조명이 대통령 관심사항으로 국정과제로 지정되면서 연고 유적이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유물의 스토리 만들기에 매달리는 분위기다. 지난해 큰 화제를 모았던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별자리판도 한계에선 육안 판독에 따른 주관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단정해선 안된다는 의견이 만만찮다. 전문가들이 좀더 시간을 갖고 신중한 자세로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 노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쁜 결과가 밀어닥칠 것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