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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창작환경 안전하지 못하면 예술가와 예술 모두 위태롭다”

등록 2019-02-10 15:27수정 2019-02-10 20:53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CTS) 활동가 로라 피셔
한국 공연계 자치규약 위한 워크숍 참여

2015년 연극계 성폭력 폭로 계기로
인권·평등·안전 위한 일터 위해
현실 반영한 구체적 가이드라인 작성
시카고 극장의 3분의1, CTS 채택

“강제성은 없지만 시스템 마련에 기여”
“한국, 법 신뢰 없고 보호장치 부족”
미국 시카고 공연예술계 자치규약인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TS)의 활동가 로라 피셔.
미국 시카고 공연예술계 자치규약인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TS)의 활동가 로라 피셔.
“창작 환경이 안전하지 못할 때 예술가와 예술 두 가지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 모인 배우, 연출자 등 20여명의 연극인이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TS·시티에스)에 담긴 목적선언을 함께 읽었다. 시티에스는 2015년 미국 시카고 연극계에서 성폭력 피해 증언이 터져 나온 이후 극단 관계자, 배우 등 종사자들이 2년에 걸쳐 만든 자치규약이다. 오디션, 사전 제작 단계부터 연습, 공연 종료 시점까지 남녀 연극인들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일하기 위한 방안이 담겨 있다. 국내 연극인들이 모여 시티에스를 함께 배운 이 자리는 ‘한국형 공연예술계 자치규약’(KTS·케이티에스) 제작을 위한 집중워크숍이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과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가 배우 출신인 ‘시티에스 활동가’ 로라 피셔를 연사로 초청해 제작 경험을 공유했다.

피셔는 “연극계는 일터로서 법의 보호를 받기엔 규모가 너무 작았다”며 “성폭력을 처벌하는 형법, 고용안정을 위한 고용법, 연극인노조가 만든 조합규정 등이 있지만 이것들은 언제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에나 드러났기에 사전에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구조적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33쪽 분량의 시티에스는 실제 현장 상황에 맞춰 가이드라인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오디션은 3시간 이하로 진행하고, 밤 11시를 넘겨선 안 된다. 극중 성적 행위나 노출이 요구되면 오디션 단계에서부터 배우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18살 미만 출연자는 학대 예방 차원에서 개인 분장실을 주도록 권고하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몸싸움·전투 장면 등에선 전문 안무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성적 괴롭힘에 대한 개념도 정리했다. 합의된 범위를 넘어선 신체접촉이나 배역 배분 등 ‘미끼’를 던져 성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 배우의 동의 없이 성적인 내용을 즉흥적으로 만드는 행위 등이다. 피셔는 “학대나 폭력을 가능케 하는 건 조직 내의 권력 차이, 침묵과 허용, 폭력적인 행동에 대한 교육의 부족, 소통경로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며 “시티에스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적발하는 것보다 전반적인 상황을 개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성이 없는 자율 규약이지만 있고 없고는 큰 차이를 만들었다. 피셔는 “소규모 극장들은 자체 규약이 없어 연습 시간의 적절성, 계약서 작성의 중요성 등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규약은 그동안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던 연극인들에게 도음을 주고 있다”고 했다.

시티에스는 현재 시카고 내 극장(약 200여개) 3분의 1인 60여곳에서 채택해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미투(나는 고발한다)가 전사회로 확산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시티에스를 참고하기도 한다.

미국 시카고 공연예술계 자치규약인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TS)의 활동가 로라 피셔가 9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열린 ‘한국형 공연예술계 자치규약(KTS, 가제)’ 제작을 위한 워크숍에 참여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 공연예술계 자치규약인 ‘시카고 시어터 스탠더드’(CTS)의 활동가 로라 피셔가 9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열린 ‘한국형 공연예술계 자치규약(KTS, 가제)’ 제작을 위한 워크숍에 참여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날 워크숍에 참가한 연극인들은 피셔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4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오디션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정보공개는 어디까지 하고 있나” “배우나 스태프가 다쳤을 경우 책임 소재는 어떻게 규명하느냐” 등이다. 피셔는 “여러 의견을 들어보니 한국은 법에 대한 신뢰가 없고 보호장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티에스가 폭력이나 학대 등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적인 접근을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참가자들도 케이티에스가 ‘위계를 만드는 호칭 문제에 대한 합의’, ‘회식·쉬는 시간·연습시간 등에 대한 규정’, ‘존엄에 대한 명시’ 등을 담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참가자들은 시티에스에서 부정적인 말이나 행동을 다루는 대처법인 ‘아이쿠! 아얏!’(Ooops and Ouch)에도 관심을 보였다. 예컨대 ㄱ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을 때 ㄴ이 “아얏”하고 반응하면 ㄱ의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의사 표시다. 상황파악을 한 ㄱ이 후회한다는 의미로 “아이쿠”를 말하면 “아얏”을 외친 사람이 대화를 계속 이어갈지 결정권을 갖게 된다. 피셔는 “강하게 방어하지 않고도 간단한 단어로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어색하지 않고) 재밌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 실제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워크숍은 아쉬움도 남겼다. 규약의 필요성을 동감해 남녀 성비가 비슷하게 시작했던 시티에스와 달리 한국 집중 워크숍에 참가한 남성은 한명밖에 없었다. 극장 관계자도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뿐이었다. 우 극장장은 “지난해 초 남산예술센터가 성추행 폭로가 나온 한명구 배우 출연작인 연극 <에어컨 없는 방>의 공연을 전격 취소했다. 미투 사태에 따른 첫 공연 취소여서 배우, 제작진들을 다 모아 회의를 했다”면서 “더 많은 극장관계자들이 가이드라인인 케이티에스 제작에 참여해 의견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의 박영희 연출가는 “미투 이후 1년이 지나면서 일상적이었던 다양한 폭력이 괜찮지 않다는 공동의 인지가 생기고, 법망의 회색지대에 있는 예술가들을 위해 케이티에스 같은 규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등이 생겼다”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고 케이티에스에 대한 논의가 계속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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