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쉼표가 찍히는 연휴엔 생각나는 사람들 있다. 보고 싶은 사람, 얘기하고 싶은 사람, 고마운 사람, 안아주고 싶은 사람…. <한겨레> 문화팀이 그동안 스크린에서, 무대에서, 또는 인터뷰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 골랐다. 만나서 참 좋았던 사람, 깨달음을 준 사람, 감동을 준 사람, 나를 울린 사람. ‘업어주고 싶은 사람들’을 소개한다.
연극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지를 운명. 저주받은 남자는 고향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길을 나선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운명, 그것이 인간이다”는 내레이터의 말대로 그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부은 발’이라는 뜻의 오이디푸스는 신들에게 분노하고, 절규하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자신의 눈을 찔러 깊은 어둠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황정민은 우리가 아는 이 식상한 고전을 뻔하지 않게 전달한다. 슬픔, 불안, 분노 같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90분간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로 보여주며 관객을 압도한다. 미세한 손 떨림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 그의 연기는 연극을 왜 배우의 작품이라고 하는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이달 2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시제이(CJ)토월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오이디푸스>는 지난해 <리처드 3세>에 이은 배우 황정민의 연극 차기작이다. 10년 만의 무대 복귀작인 <리처드 3세>에서 출중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그의 매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이디푸스> 연습실 공개 현장에서 황정민은 “공연 때마다 늘 최선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며 “<리처드 3세> 공연을 하고 나서 어떤 연극이든 두렵지 않다고 이야긴 하곤 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것보다 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정민의 연기 디엔에이(DNA)는 영화보다는 무대 연기에 가깝다.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했던 그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주목받은 이후에도 연극 무대를 잊지 않았다. 지난 2012년에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와 연극 <어쌔신>에 출연했고, 2015년에는 뮤지컬 <오케피> 무대에 올랐다. <국제시장> <베테랑> <군함도> 등 영화마다 남다른 연기를 선보이며 ‘1억 관객’ 배우가 됐음에도 황정민은 ‘영화’ 배우가 아닌 진정한 ‘배우’가 되길 원했다.
이번 <오이디푸스>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인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에 휘말리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생애를 그린다. “공부하면서 배웠던 작품이라 연극쟁이들에겐 교과서 같다”고 말하는 황정민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 오이디푸스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어떻게 하면 공연마다 똑같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수많은 오이디푸스 중에서도 황정민의 오이디푸스가 색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다행일 것 같다”고 전했다.
베테랑 연기자지만 황정민은 연극 무대에 오를 때마다 “긴장됨의 연속”이라는 표현을 자주 해왔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는 관객이 없어서 무대를 올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면서 “진짜 유명해지면 이런 날이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유명해져서 많은 관객과 소통할 것이라고 다짐했는데 그런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을 할 때 비로소 자유를 느끼기라도 하는 듯 “영화도 좋지만 연극이 더 좋다”고 말하는 황정민의 연극에 대한 애정은 관객들도 고스란히 느낀다. “나는 괜찮소. 내 발로 걸어가겠소”라는 마지막 대사를 읊으며 그가 사라질 때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는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정민은 “(연극) 마지막에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는 대사가 나오는 데 극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 말인 듯해 그 대사를 할 때가 제일 기분 좋고 행복하다”면서 “중요한 작품이니 관객들에게 좋은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허투루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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