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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동양 최대’ 파이프오르간, 시작은 김종필의 ‘경쟁심’이었다

등록 2019-01-28 05:00수정 2019-01-28 13:14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 수리에 부쳐
천상의 화음 41년, 그 압도적 웅장함을 기억하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설치된 건반 6단짜리 파이프오르간은 설치 당시 ‘동양 최대’ 크기였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설치된 건반 6단짜리 파이프오르간은 설치 당시 ‘동양 최대’ 크기였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마흔’은 인간에게만 체력이 꺾이는 나이가 아닌 모양이다. 올해로 41살을 맞은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도 안식년에 들어갔다. 음악적 수요보다 ‘국가적 자존심’을 건 경쟁적 차원에서 탄생했다는 ‘출생의 비밀’을 따지는 것은 심장(바람상자)마저 교체해야할 정도로 노쇠해진 파이프오르간에 야박한 일일지 모르나, 이 거대한 악기엔 관변 행사 무대로 주로 쓰였던 세종문화회관의 과거부터 현재 모습까지 영욕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의 생애를 더듬으며, 한국공연문화 변천사의 단면을 들여다본다.

1978년 5월에 방한한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수상이 세종문화회관에 들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8년 5월에 방한한 에드워드 히스 전 영국수상이 세종문화회관에 들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1978년 세종 개관과 함께 설치
비용 6억…피아노 1700여대 값
대중화 위해 교육 프로그램 운영
”압도적 소리에 학생들 많이 놀라”

에피소드
고 김종필이 일본 NHK홀 본 뒤
더 큰 6단짜리로 만들라고 지시
영국 총리 방한 때 직접 연주도

현재
클래식 전용 롯데콘서트홀 등장
파이프오르간 최고 자리 위협
세종쪽 파이프 뜯어 먼지 제거
바람상자 고무천으로 수리 결정

미래
”근현대사 역사성·장소성 극대화
시민에 다가갈 활용법 고민하고
다양한 연주회도 기획할 필요”

■ 국위선양 수단된 ‘동양 최대’ 오르간 중세 유럽에서 파이프오르간은 도시의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교회의 크기는 도시의 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였고, 얼마나 좋은 파이프오르간이 있냐에 따라 교회의 서열이 정해졌다. 1978년 개관한 세종문화회관에 ‘동양 최대’ 파이프오르간이 들어선 것도 마찬가지 이치였다. 경쟁 주체가 교회나 도시에서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본래는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할 계획이 없었지만, 세종문화회관 계획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경쟁심’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일본이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 엔에이치케이(NHK) 콘서트홀의 건반 5단짜리 파이프오르간을 구경하곤, 그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큰 파이프오르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일본보다 못할 게 없다는 대외적 과시인 셈이었다.

6단 건반에 8098개의 파이프, 32개의 한국식 범종, 40개의 프랑스식 종으로 이뤄진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은 그렇게 ‘동양 최대’ 타이틀을 일본에서 빼앗아왔다. 설치비용만 6억1300만원으로, 당시 피아노 1700여대 값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살릴 돈을 쓸데없는 데 낭비한다”며 반대에 나선 시민단체들도 있었다.

오르가니스트인 채문경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에 세종문화회관에 설치될 파이프오르간을 독일 현지서 미리 봤다고 한다. “독일 슈케사가 제작을 맡았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오르간이라고 미리 조립해 일반 시민에게 공개했었어요. 당시 독일 사람들이 아시아 사람들은 체구가 작은데 저걸 어떻게 연주하냐며 놀라워할 정도의 크기였죠.” 채 교수는 1978년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공연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바흐의 ‘토카타 F장조’를 연주곡으로 골랐어요. 파이프오르간은 손과 발로 연주하는 악기인데 이 곡은 처음에 발로만 악보 한 줄을 쭉 치거든요. 손이 아닌 발로 쳐도 소리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연주했는데 청중들에겐 어려운 곡이었을 것 같아요.(웃음)”

동양 최대 파이프오르간이라는 홍보로 눈도장은 확실히 찍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던 영국 에드워드 히스 전 총리는 그해 5월 방한 때 일부러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멘델스존 ‘소나타 2번’ 등을 45분 동안이나 연주하기도 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설치된 파이프오르간. 세종문화회관 제공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설치된 파이프오르간. 세종문화회관 제공
■ “악기는 참 좋은데…” 파이프오르간 공식 연주회(1978년 6월8일) 테이프를 끊은 건 한국인이 아닌 오스트리아 출신 오르가니스트 한스 하젤벡이었다. 하젤벡 연주회 사흘 뒤, 미국·유럽에서 활동하던 오르가니스트 윤양희 전 세종문화회관 전문위원이 한국인으로는 처음 초청독주회를 가졌다. 윤 전 전문위원은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먼저 연주를 했으면 했는데 슈케사가 자기네 악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연주자를 먼저 추천했던 것 같다”며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오르간은 중학교 교과서 표지에도 실리는 등 당시에 국위선양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회고했다. 첫 연주 이후 윤 전 전문위원은 세종문화회관의 공연기획자 및 오르가니스트로 25년간 활동하면서 해외 유수의 오르가니스트들을 국내에 초청하는 일을 맡았다. “한번은 베르나 라가세라는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가니스트가 연주회를 열었어요. 시각장애인이라 그분을 무대 중앙의 이동용 연주대(콘솔) 앞에 데리고 나가 건반에서 ‘도’음을 알려드렸던 기억이 나요. 한 외국인 연주자는 오르간 크기가 감당하기 벅찼는지 ‘내가 이 곡을 연주할 건데 네가 먼저 연주를 보여달라’며 부탁한 적도 있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건데 연주회를 망치고 싶진 않았겠죠.”

채문경 교수도 개관 이후 6년간 초대 상임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다양한 연주회를 열었다.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만의 특징은 범종이에요. 서양 연주곡들은 이 범종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어 저는 매년 한 번씩 창작곡을 받아 연주했어요. 김청묵 작곡가의 ‘토카타’, 이영조 작곡가의 ‘코스모스’ 등을 연주했죠. 특히 ‘코스모스’는 웅장하고 섬세한 곡이어서 외국에서 연주해도 청중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러나 파이프오르간이 아무리 값비싸고 수준이 높다고 해도, 공연장 시설이 못 받쳐줘 아쉬움도 컸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대규모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다목적홀로 지어진 탓에 내부 마감재가 음을 흡수하는 재질이어서 파이프오르간의 풍성한 울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음악 전문가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회가 계속 열렸지만 그 진가가 100% 드러나진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세종문화회관은 파이프오르간을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교육과 공연을 묶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는 파이프오르간> 등의 기획도 꾸준히 선보였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종문화회관은 파이프오르간을 친숙하게 만날 수 있는 교육과 공연을 묶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는 파이프오르간> 등의 기획도 꾸준히 선보였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은 대중과의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교육’의 길을 추가로 개척했다. 참가비가 천원인 ‘천원의 행복’ <파이프오르간과 떠나는 음악여행>을 비롯해 취약계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파이프오르간의 역사와 작동원리, 연주 감상법 등을 소개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는 파이프오르간> 등의 프로그램을 상설 운영했다. 윤 전 전문위원은 “파이프오르간은 한 대의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풍성한 음향을 들려줄 수 있는 악기 중의 왕”이라며 “파이프가 많을수록 플루트, 바이올린, 오보에, 트럼펫 등 낼 수 있는 소리가 많아지는데 단일 악기론 소리도 제일 커 초등학생들에게 들려주면 많이들 놀랬다”고 회상했다.

2016년에 클래식 콘서트홀로는 처음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 롯데콘서트홀이 등장하면서 세종문화회관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2016년에 클래식 콘서트홀로는 처음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한 롯데콘서트홀이 등장하면서 세종문화회관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 ‘우수한 음향’ vs ‘역사의 권위’…파이프오르간의 진검승부 1927년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교회나 성당, 대학과 공연장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은 현재 150개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국내 공연장에서 유일하게 파이프오르간을 소유했던 세종문화회관이 ‘맞수’를 만난 것은 2016년 무렵이었다. 2000석 규모의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로 음향시설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롯데콘서트홀은 2년간의 공사를 거쳐 5천여개의 파이프를 통해 68가지 소리를 구현하는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오스트리아 빈 뮤직페라인 홀의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한 리거사가 제작을 맡았고, 제작비로 25억원이 지출됐다. 세종문화회관과 롯데콘서트홀, 횃불선교센터 등의 파이프오르간 유지·보수를 맡은 안자헌 오르간제작 마이스터는 “세종문화회관과 롯데콘서트홀 오르간 둘 다 좋은 악기지만 홀 시설 때문에 음향 차이가 있다. 세종문화회관과 달리, 클래식 전용 홀인 롯데콘서트홀은 음이 반사되는 마감재를 써 객석 뒤까지 음이 잘 전달된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오르간 콩쿠르’ 등 세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올해 롯데콘서트홀의 오르간 오딧세이 공연을 맡은 박준호 오르가니스트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제작사가 다른 두 오르간의 음색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음향은 예외 없이 새로 지어진 롯데콘서트홀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세종문화회관은 “롯데콘서트홀이 개관하면서 보다 차별화된 오르간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대극장의 웅장함을 강조할 수 있는 <피날레> <오르간 싱즈> 등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공연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이전에 국내 유일한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로 통했던 예술의전당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서둘러 개관하느라 파이프오르간을 갖추지 못했다. 설치를 전제로 무대 뒤 벽면 전체가 설계됐으나 2002년 월드컵과 2005년 공연장 보수 공사를 앞두고 몇 번 논의가 이뤄졌을 뿐 막대한 비용과 오랜 제작시간 때문에 이젠 파이프오르간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세종문화회관은 2008년부터 정기적인 파이프오르간 공연을 기획해 10년간 연주회를 이어왔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종문화회관은 2008년부터 정기적인 파이프오르간 공연을 기획해 10년간 연주회를 이어왔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세종문화회관은 5억원 가까이 드는 수리비를 서울시 출연금과 시민 모금을 통해 마련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다. 안 마이스터는 “파이프를 다 뜯어 그간 깊이 쌓인 먼지를 제거하고, 바람상자의 가죽천을 반영구적인 고무천 등으로 교체하면 파이프오르간은 100년 정도 너끈히 쓸 수 있어 극장 건물보다 더 오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참에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을 더 활용할 수 있는 제언들도 쏟아진다. 박 오르가니스트는 “파이프오르간은 한번 설치되면 붙박이가 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는 장소성과 역사성이 짙은 악기다. 파이프오르간이 국내에 잘 알려지기 전에 설치된 배경도 흥미롭고, 광화문이라는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좋은 위치에 자리한 것도 이점인 만큼 구도심 역사물 탐방에 오르간을 넣어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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