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살의 에바 호프. 그는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을 상대로 현대문학 거장인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 소유권을 놓고 30년간 소송 중이다. 원고를 유산으로 물려준 엄마도, 사랑했던 애인도 호프보다 원고를 더 사랑했을 만큼 원고는 그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지만 원고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원고에 집착해 사는 그를 동네에선 미친 여자 취급하나, 그는 안다. 원고가 없으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걸. 원고는 지옥 같은 일상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원고를 부여 쥔 호프는 말한다. “틀린 것 알아. 익숙한 것에 숨은 거야. 내가 너고 네가 나야.”
창작뮤지컬 <호프(HOPE):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브 삼아 ‘요제프 클라인’이란 가상 작가를 탄생시켰다. 살아 생전엔 주목받지 못했던 카프카는 죽으면서 자신의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친구이자 작가인 막스 브로트는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브로트는 그의 비서 에스더 호프와 <소송> <아메리카> 등을 출간했고, 죽으면서 호프에게 카프카의 원고 일체를 남겼다. 호프 역시 자신의 두 딸에게 원고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 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과 호프의 두 딸은 지루한 법정싸움을 벌였다.
실제 사건의 큰 틀만 가져온 <호프>는 누가 정당한 원고 소유자인가를 가리는 대신 일생을 걸고 원고를 지켜온 여성 호프에 주목한다. 호프가 어떻게 원고를 만나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 원고를 왜 지키려 했으며 결국 원고 때문에 그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준다. 재밌는 건 미발표 원고를 의인화한 캐릭터 케이(K)다. 케이는 호프의 삶을 모두 지켜봐 왔기에 누구보다 호프를 이해하고 아낀다. 법정에서 호프를 탓하는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것만 물어보지 말고, 하고 있는 말을 들어주면 되는 거잖아”라며 호프를 대변하거나 아무도 보듬어주지 못한 호프의 삶을 위로하며 “넌 수고했다. 충분하다. 살아냈다. 늦지 않았다”는 말로 용기를 북돋워 준다. 케이가 호프에게 하는 모든 말들은 관객들에게도 큰 위로와 공감으로 다가간다. ‘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너의 이야기로 네 인생을 채워라’, ‘너의 인생도 빛날 수 있다’며 응원해주고 안아주는 덕에 객석에선 눈물,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극 후반부 내내 들린다.
잘 짜인 넘버(노래)도 감정이입을 돕는다. 현재의 호프(차지연·김선영)와 과거의 호프(이예은·이윤하)가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그리는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콩닥콩닥 콩콩콩콩’을 비롯해 에바 호프가 법정서 떠나며 앙상블과 함께 다 같이 부르는 ‘안녕’ 등이 특히 인상적이다. 초반 극 전개가 어수선하다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호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2018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뮤지컬 부문에 꼽힌 작품이다. 오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인 뒤 3월28일부터는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로 무대를 옮겨 다시 개막한다. 1577-3363.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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