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보여줄 것이다!” 배우 김의성은 방영 전 제작발표회에서 자신만만하게 말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증강현실(AR·에이아르)을 접목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티브이엔·tvN)이 티브이(TV) 콘텐츠 새 지평을 열고 있다. 뻔한 틀 안에서 허우적대던 드라마의 문법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드라마가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상현실(VR·브이아르)이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증강현실은 ‘포켓몬 고’처럼 실제 현실에서 가상의 무엇인가가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내내 이 증강현실과 실제 현실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간다. 투자전문회사 대표 유진우(현빈)가 게임 개발자 정세주(찬열)의 연락을 받고 스페인 그라나다에 간다. 스마트렌즈를 착용하는 순간 현실에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길을 걷다보면, 매일 같은 곳에 서 있던 동상이 움직이며 나를 공격하고, 일격을 당한 나는 가상현실 속에서 죽기도 한다. 재접속해 무기를 찾아 싸우고, 레벨업 할수록 게임 속 나는 강해진다. 그러나 유진우가 게임 속에서 죽인, 같이 접속했던 ‘유저’이자 실제 라이벌 차형석(박훈)이 현실에서도 죽으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죽은 형석이 게임 속 캐릭터인 엔피시(NPC)가 되어 계속 진우 앞에 나타나는 등 증강현실이 실제 현실과 뒤섞이며 이야기는 스릴러와 멜로를 오간다.
이 드라마의 총제작비는 200억원으로 알려진다. 3분의 1가량을 스페인에서 촬영했다. 많은 돈을 들여 증강현실을 접목한다고 했을 때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우려는 있었다. 그러나 자칫 유치할 수 있는 시도는, 매끈한 만듦새로 시청자들을 집중시켰다. 진우가 초보 레벨 단계에서 무기를 찾아 상점으로 가는 장면 등, 시청자도 낯선 게임 속에 들어가 진우의 시선을 따라가며 드라마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어떤 엔피시가 또 등장할지, 대체 형석은 왜 가상과 실제가 연결되어 죽었는지, 왜 진우 앞에 계속 나타나는지, 실종된 세주는 어디에 있는지 등 시청자 역시 진우와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는 전개도 돋보이는 점이다.
김선영 대중문화 평론가는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고, 그 방향을 무한 탐험하는 것 자체가 관전 포인트다. 두개의 세계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지움으로써 시청자가 보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새 지평이자 기존 드라마 시청법의 관성을 깨부수는 새로운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송재정 작가는 증강현실 게임 열풍을 보며 이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오랜 기간 취재했고, 무엇보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이 설정을 어떻게 접목시킬까를 특히 고심했다.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컴퓨터그래픽에 사용했다. 송재정 작가는 앞선 드라마에서도 가상과 현실의 세계가 맞닿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더블유>(W)에서는 웹툰이라는 가상 공간과 현실을 넘나들었고, <인현왕후의 남자>와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에서는 타임슬립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시트콤으로 데뷔한 그는 정극 드라마를 쓴 이후 줄곧 차원이동물에 관심을 가져왔다. 송재정 작가는 <더블유> 종영 뒤 기자간담회에서 차원이동물을 많이 하는 이유를 “더 극적인 상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안 해본 것, 희한한 것, 특이한 것을 하고 싶고 그래서 소재를 특이하게 잡는다”고 말했다.?
8회까지 방영한 드라마는 시청률 7~8%(닐슨코리아 집계)를 유지한다. 처음부터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장르적 특성에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40대 여성(13%)은 물론, 40대 남성에게도 인기가 많고, 10대 남성들도 많이 보는 등 연령과 성별을 뛰어넘는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티브이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10대들이 즐겨본다는 점은, 이 세대가 특히 열광하는 게임을 접목한 시도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증강현실이 대중문화를 바꿀 새로운 콘텐츠로 떠오를 지 주목된다. 증강현실에 앞서 가상현실과의 접목은 티브이에서 꾸준히 시도돼왔다. <문화방송>(MBC) 예능프로그램 <두니아~ 처음 만난 세계>는 롤플레잉게임 ‘야생의 땅:듀량고’를 제작한 넥슨과 합작해서 설정을 가져오기도 했다. 극중 시청자가 마치 게임을 보듯, 무기를 획득하는 식의 설정을 접목했다. 26일 개봉한 영화 <피엠시: 더 벙커>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총격 장면 등이 관객에게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병우 감독은 최근 시사회에서 “체험형 액션 영화를 만드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1월에는 가상현실을 접목한 뮤지컬 영화 <안나, 마리>도 막을 올린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제작발표회에서 주연배우 현빈은 “증강현실을 접목한 신선함과 자극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답은 둘 중 하나다. “예스 오어 예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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