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경기문화재단 김학민 이사장
김학민 이한열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경기문화재단 이사장에 임명됐다. 1998년 당시 임창렬 경지지사의 경기도 선대본부장을 맡은 인연으로 경기문화재단 설립 초기 재단 문예진흥실장으로 임명되고 꼭 20년 만의 복귀다.
20년 전 재단은 임직원 20명에 예산은 21억 원에 불과했다. 지금은 191명에 예산은 1008억여 원을 넘었다. 엄청난 양적 팽창이다. 지금은 광역은 물론 기초지방자치단체도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문화재단이라는 기구 자체가 생소했던 때였다.
“제가 문예진흥실장으로 취임하니까 문화예술인들이 사업비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다’라고 했어요. 문화예술이라는 게 시민 누구나 당연히 고루 누려야 하는 복지라고 설명했더니, 이해를 잘 못하더군요.”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한 직후여서 행정과 민간 모두가 ‘돈’ ‘돈’이라고 할 만큼 사회는 삭막했다. 그는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단다. ‘경제난을 겪는 시민이 무슨 죄냐. 나라가 잘못했지. 아이엠에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문화예술이 봉사해야 한다. 삶의 질이라는 것이 먹고 마시고 자는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문화예술은 시민 누구나 향유해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2년간 재단의 초석과 방향을 세운 뒤 재단을 훌훌 떠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무료하기도 하겠지만 ‘꿈꾸는’ 그래서 언젠가는 ‘그것이 현실이 되는’ 삶을 이어간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1967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1994년 졸업했다. 27년 만의 졸업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10월 유신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1974년 4월 유신체제에 저항한 민청학련 사건의 연세대 책임자로 지목되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1975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재단 설립 초기 실장으로 일해
20년만에 ‘몸집 불린’ 재단 수장으로
“개성과 문화교류 이번엔 꼭 이룰터”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서 고초
‘우상과 이성’ 등 500종 이상 책 내
인문학적 음식 칼럼으로도 명성 학교로 돌아갈 수 없던 질곡의 시대, 그는 출판의 길을 택했다. 한길사 편집장과 학민사 대표로 있으면서 <우상과 이성> <민족경제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500여 종의 인문사회과학서적을 냈다. 김 이사장은 “그때 대학생들을 다 우리 책으로 가르쳤다”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야인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의 5·17쿠데타로 야당 정치인을 지냈던 부친(김윤식)과 함께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엮여 신군부의 합동수사본부에서 고문을 당해 왼쪽 고막이 터졌다. 이때 얻은 상처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독재의 시대, 민주를 꿈꾸며 역사의 한복판에 몸을 던져온 그이기에 남들은 ‘저항적 지식인’이라고도 하지만 그는 이런 말에 질색했다. 김 이사장은 “나는 민주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이고 문화주의자다. 나는 문화가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작고한 노회찬 전 의원이 나와 똑같은 모토를 걸은 것을 알았다. 아마 내가 20여년 전부터 3대 주의자를 내걸었으니 내가 원조일 것”이라며 웃었다. 재단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삶 역시 역사와 문화를 벗어나지 않았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이 녹아든 음식 칼럼 집필이 단적인 예다.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연재(<한겨레21>)를 시작으로 음식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술에 관한 책도 냈다. 그는 20년 전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김 이사장은 “개성은 경기도와 한뿌리다. 왕성을 중심으로 200리, 왕성을 지키는 경계지역을 기전지방이라 했다. 문예실장으로 있을 때 개성과 문화교류를 위해 북측 인사들과 7~8차례 만났는데, 끝내 교류를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젠 문재인 대통령 노력으로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커지고 이재명 경기지사도 도정 키워드가 평화인 만큼 이번엔 꼭 성사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개성시 쪽과 예술단의 문화공연 교류, 개성 문화유적 공동조사·연구, 개성 문화유산 경기도 전시 등을 협의해 추진할 생각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북한 전문가들과 함께 개성에 ‘평화대학’ 설립을 추진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4개의 평화대학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한의 평화대학을 꿈꾼다. 남북의 공동번영과 전쟁 없는 한반도를 위해 젊은이들이 만날 수 있는 곳인데 현재 구체적인 프로그램 개발도 진행 중이다”고 했다. 올해 나이로 일흔살인 그는 아직도 ‘청년’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그렇다. 그의 새로운 꿈은 이뤄질까. 김 이사장은 “곡절 많은 삶이었지만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이미 내 삶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김학민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경기문화재단 제공
20년만에 ‘몸집 불린’ 재단 수장으로
“개성과 문화교류 이번엔 꼭 이룰터”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서 고초
‘우상과 이성’ 등 500종 이상 책 내
인문학적 음식 칼럼으로도 명성 학교로 돌아갈 수 없던 질곡의 시대, 그는 출판의 길을 택했다. 한길사 편집장과 학민사 대표로 있으면서 <우상과 이성> <민족경제론>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500여 종의 인문사회과학서적을 냈다. 김 이사장은 “그때 대학생들을 다 우리 책으로 가르쳤다”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야인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의 5·17쿠데타로 야당 정치인을 지냈던 부친(김윤식)과 함께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엮여 신군부의 합동수사본부에서 고문을 당해 왼쪽 고막이 터졌다. 이때 얻은 상처는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독재의 시대, 민주를 꿈꾸며 역사의 한복판에 몸을 던져온 그이기에 남들은 ‘저항적 지식인’이라고도 하지만 그는 이런 말에 질색했다. 김 이사장은 “나는 민주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이고 문화주의자다. 나는 문화가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작고한 노회찬 전 의원이 나와 똑같은 모토를 걸은 것을 알았다. 아마 내가 20여년 전부터 3대 주의자를 내걸었으니 내가 원조일 것”이라며 웃었다. 재단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삶 역시 역사와 문화를 벗어나지 않았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이 녹아든 음식 칼럼 집필이 단적인 예다. ‘김학민의 음식이야기’ 연재(<한겨레21>)를 시작으로 음식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술에 관한 책도 냈다. 그는 20년 전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김 이사장은 “개성은 경기도와 한뿌리다. 왕성을 중심으로 200리, 왕성을 지키는 경계지역을 기전지방이라 했다. 문예실장으로 있을 때 개성과 문화교류를 위해 북측 인사들과 7~8차례 만났는데, 끝내 교류를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젠 문재인 대통령 노력으로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커지고 이재명 경기지사도 도정 키워드가 평화인 만큼 이번엔 꼭 성사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개성시 쪽과 예술단의 문화공연 교류, 개성 문화유적 공동조사·연구, 개성 문화유산 경기도 전시 등을 협의해 추진할 생각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북한 전문가들과 함께 개성에 ‘평화대학’ 설립을 추진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4개의 평화대학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한의 평화대학을 꿈꾼다. 남북의 공동번영과 전쟁 없는 한반도를 위해 젊은이들이 만날 수 있는 곳인데 현재 구체적인 프로그램 개발도 진행 중이다”고 했다. 올해 나이로 일흔살인 그는 아직도 ‘청년’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그렇다. 그의 새로운 꿈은 이뤄질까. 김 이사장은 “곡절 많은 삶이었지만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이미 내 삶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했다.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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