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김윤수 선생의 부음을 전하면서 온라인, 오프라인 뉴스들은 한결같이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민족예술이론의 지주”라고 선생님의 사회적, 예술적 삶을 정의 내렸다.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는 이력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여기에 덧붙여 한 생을 예술적 동지로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민족예술이라는 공동체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늠름한 느티나무 같은 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선생님이 생전에 펴낸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된 <한국현대회화사>라는 문고본 한 권뿐이고 평론도 뜸한 편이었지만 이 글들은 80년대 민족예술 전개 과정에서 풍수쟁이가 몸에 지닌 패철과도 같은 것이었다.
김윤수 선생은 1936년 경북 영일군 청하면(현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뒤 대학 강단에 서면서 미학자로서, 미술평론가로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극악한 군사독재는 선생을 학자의 길에만 전념할 수 없게 하였다. 유신헌법 반대를 금지한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고,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있을 때는 강제 폐간되는 아픔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튼튼한 이론과 스승으로서의 넓은 품은 오윤, 신학철, 김정헌을 비롯한 화가, 이애주,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김영동 같은 연희패 등 민중예술 제1세대를 길러내어 이 땅에 꺼질 수 없는 민족예술의 불씨를 일구어 내셨다. 정릉 골짜기 허름한 선생님 집에는 예술패뿐만 아니라 유인태, 서중석, 유영표 등 올곧은 젊은이들이 드나들고 정초엔 세배꾼이 줄을 이었다. 세상이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 선생님은 끝까지 곧게 서서 우리를 그렇게 지켜주셨다.
세상이 민주화되어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여 영남대 교수를 지내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며 경륜을 펼치기도 하였으니 선생님의 미학과 삶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긴급조치9호 위반 사건도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타계하기 일주일 전인 지난 21일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불행히도 고질적인 디스크로 평생을 고생하셨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3학년 때인 1969년 봄 학기에 선생님의 <예술학 특강>을 수강할 때부터인데 그때 편찮았던 것이 돌아가시는 당일까지 50년을 그치지 않았으니 그 육체적 고통의 나날들은 남들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선생님의 저술활동이 미미한 것에 아쉬움을 말하곤 하였지만, 그 이유는 그놈의 고질병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 언제가 가장 고통스러우시냐고 여쭈니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고 하시는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평생 아픈 몸을 안고 사셨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욕조에 앉아 따뜻한 물에 목욕하다 심정지로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것이 선생님의 육체적 아픔으로부터 해방이었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몇 해 전부터 창비에서 성심껏 준비하고 있는 ‘김윤수 평론집’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로 어쩌다 문필가로 이름을 얻은 것은 선생님의 저 간명하고, 단단하고, 쉽고, 명쾌한 평론을 모범으로 삼고 배운 것이었다. 장담컨대 선생님의 평론집은 ‘민족예술 이론의 고전’으로, 그리고 ‘불후의 비평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이제 선생님의 품에서 자란 이들이 이 작업을 마무리하여 내년 1주기에는 출간을 보아 선생님을 다시 세상으로 모셔와야 할 일이다.
선생님! 그때 우리들은 멋진 출판기념회를 가질 것인데 잠시 하생하시어 자리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우리들은 선생님을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기릴 것입니다.
글·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미술평론가), 전 문화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