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바이올린’ 소리의 비결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인빌 1697’ 바이올린. 무네츠구 바이올린 콩쿠르 누리집 갈무리
수백년 지나도록 심오한 울림 지닌
연주자들조차 접하기 힘든 명품들 가문비·단풍나무 등 재료가 첫째
제작 당시 기후가 섬세한 소리 좌우
도료 배합 비법도 중요한 영향 강철·은·알루미늄 쓴 강한 줄에
정확한 표현 담아낼 활 소재 중요
무엇보다 연주자와의 궁합이 필수 온·습도 유지는 물론 점검·보수까지
만듦새보다 중요한 건 철저한 관리
애호가들 재테크 수단으로도 각광 칠(도료)도 중요하다. 칠은 온도나 습도의 변화를 보호해주고 방수 효과도 갖는다. 이승진 제작자는 “베이스 칠을 만들려면 천연 송진, 열매 진액, 곤충 진딧물로 만든 락카 등을 섞어서 사용한다”면서 “각 재료마다 탄성, 내구성, 물성이 다 다른데 이를 어떻게 배합해 바르냐가 제작자의 비법이 된다”고 했다. 현악기의 줄과 활도 악기 본체만큼이나 연주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바이올린 줄은 강철에 은, 알루미늄 등을 감아 코팅한 현을 사용한다. 20년 넘게 정경화·정명화(첼리스트)의 악기를 관리하고 있는 유제세현악실 유제세 대표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줄마저 부드러우면 소리가 뻗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악기는 강한 줄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활은 브라질산 나무와 몽골 말의 말총이 주로 쓰인다. 프랑스에서 1800~1900년대 중반 주로 제작된 사르토리 활은 활 중의 명품으로 평가받는데 현대적이면서도 다양한 연주 기법에서 두루 정확한 표현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시회, 경매장마다 악기 구매자들 발길 연주용인 희귀한 좋은 악기는 몸값이 수백억대까지 나가는 만큼 개인 소장보다는 문화재단이나 기업에서 대여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1993년부터 악기은행을 운영하며 유망주에게 악기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도 2011년에 명품악기인 과다니니 투린(1774년산)을 대여받았는데 이 악기는 이전에 클라라 주미강도 사용했었다. 하지만 비싸고 좋은 악기도 연주자와 궁합이 맞아야 한다. 금호악기은행의 악기를 관리하는 김동인 대표는 “두 사람에게 잘 맞았던 과다니니 투린을 (고인이 된) 권혁주는 원하는 소리를 내는데 1년을 고생해야 했다”면서 “연주자에겐 자신에게 맞는 악기를 찾는 것이 큰 고민”이라고 말했다. 명품 악기는 아니어도 제대로 소리를 내는 검증된 악기를 구하려는 연주자들은 해외로 직접 나가거나 경매를 이용해 구입한다. 미술품 경매사인 케이옥션은 연주자나 클래식 악기 애호가들의 수요를 파악하고 지난 3월부터 악기 경매를 시작했다. 처음엔 고악기 경매로 시작했으나 재테크용보다 실제 연주 목적으로 구입하는 이들이 많아 현대악기를 더 많이 소개하고 있다. 악기는 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매 13일 전부터 전시를 하고 직접 실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껏 국내서 가장 비싼 낙찰가를 올린 악기는 유진 사르토리 첼로 활로 6300만원에 낙찰됐다. 케이옥션 관계자는 “군소악기상과의 거래는 발품이 필요하고, 대여악기는 재능 있는 연주자들 위주로 돌아가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없다 보니 제작정보와 가격이 투명한 경매를 통해 악기를 구입하려는 연주자나 클래식 애호가가 많다”고 말했다.
김동인 스트라디 현악기 공방 모습.
“스승님처럼…오래도록 내 악기 성장 지켜보고 싶어요”
■ 이승진 현악기 제작자 인터뷰
지난해 겨울에 사라 장(바이올리니스트)이 제가 만든 바이올린을 소리가 좋고 잡음이 없다며 칭찬해주더라고요. 소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그 악기를 올해 ‘슬로바키아 아르벤시스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 출품해 상(2위)을 받았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크레모나에서 이승진(39)씨는 13년째 현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요리 유학을 갔다가 취미로 배운 악기 제작에 빠져 직업을 바꾼 그는 크레모나의 스트라디바리 국제현악기제작학교를 졸업하고 3대째 현악기를 제조하는 모라시 공방에서 일을 배웠다. 1대 장인인 지오 바티 모라시에게 기술을 전수 받고 5년 만에 독립해 현재는 자신의 개인 공방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 안라이 현악기 제작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 1위(2013) 등 국제 대회에서 10여회 수상을 한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달 26일 전시회가 열린 서울 종로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현악기 제작자는 경력이 20년은 넘어야 존중받는데 황금기인 50대를 기다리며 잘 버티고 있다”면서 웃었다.
그가 사는 크레모나는 수백 년 전부터 아마티, 스트라디바리, 과르니에리 같은 거장들의 계보를 이어받은 공방들이 약 120개 넘게 운영 중이다. 정육점, 서점 등 가게마다 바이올린이 하나씩 놓여 있는 이곳에서 그는 크레모나의 전통방식에 따라 최소 10년 이상 햇빛과 그늘에 건조한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로 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혼자서 하루 8시간씩 꼬박 일한다 치면 1년에 8~10대의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어요. 이번 전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스승의 모델을 따서 만든 비올라에요. 지난 2월 별세하셔서 가슴이 아프네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악기의 최적 소리를 찾기 위해 의지하는 건 아내다. 현재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 중인 아내 강운영 바이올리니스트는 그가 악기를 만들 때마다 단원들에게 가져가 평가를 전달해준다. 사라 장과의 만남도 아내 덕분에 이뤄졌다.
그는 “이탈리아 악기 특징이 고음에서 깨끗하고 밝게 뻗어 나가는 음색을 가졌는데 제 악기의 특징이기도 하다”면서 “한국에선 새 악기가 소리가 잘 안 날 것이란 선입견이 강한데 옛날보다 기술의 진보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좋은 소리를 내는 건강한 새 악기도 많아지고 있으니 편견이 사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전수돼온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그도 자신의 손을 떠난 악기를 오랫동안 보고 싶은 바람이다. “모라시 공방에서 일할 때 30대 연주자가 스승님을 찾아와 20년 전 사간 악기로 음반도 내고 오케스트라 단원도 됐다며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제 악기가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장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소리를 내는 걸 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고요.”
이탈리아 명품 현악기 제조자 이승진씨가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직동 전시장에서 자신이 만든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이씨는 이탈리아 인라이 현악기 제작 콩쿠르 바이올린 1위를 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10회 이상 수상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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