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서울역사에서 서쪽 출입구로 나서면, 눈을 사로잡는 빨간색 건물이 있다. 국립극단이다. 2010년 7월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복잡한 서울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지 9년째이지만, 시민들의 눈에 부쩍 띈 건, 지난해 11월 건물을 가로막던 담장을 허물면서다. 국립극단 쪽은 “담장을 없애달라는 시민들의 요청도 있었고, 국가 소유 부지여서 문체부와 극단이 협의해 결정했다”고 말했다.
소통을 약속하듯 담장이 허물어지던 그때, 연극인 이성열도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해 관객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국립극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연극 <개구리> 제작 과정에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예술가를 배제하는 ‘블랙리스트 사태’의 도화선이 된 곳이다. 연극계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명을 띠고 그는 빨간 건물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취임 1년을 맞았다. 지난 12일부터 취임 뒤 첫 연출작인 <오슬로>도 무대에 올리고 있다.
■ 행정가 이성열 지난 16일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사무실에서 마주한 그는 “여기저기 불 끈다고 정신없던 1년이었다”고 말했다. 먼저, 수습이 급했다. 블랙리스트와 미투 등 취임 이후 사과 성명만 네다섯번 냈고, 블랙리스트 피해자인 6명을 직접 만나 국립극단 입장에서 사과의 말도 전했다. 마음을 다친 직원들의 심리 치유도 시급했다.
그가 지난 1년간 가장 신경 쓴 것은 “작품을 생산하는 시스템 만들기”였다. 창작작품을 개발해 무대에 올리는 일을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블랙리스트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작품 제작 절차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희곡 우체통’을 신설해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작품을 받고, 좋은 작품을 선정해 두달에 한번 낭독 공연을 했다. 150편 중 6편이 낭독 무대에 올랐고, 그 중 한편은 극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우리나라는 좋은 작품들이 한번 딱 공연하고 사라지는 일이 많다. 작품이 지속적으로 관객을 만나고, 좀더 큰 무대로 옮겨가면서 더 오래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는 유통구조를 만들고 싶다.” 국립극단이 보유한 소극장 세곳도 각각 역할을 특성화했다.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작가 중심 창작극장, 소극장 판은 연출 중심 실험적인 극장, 명동예술극장은 관객 중심의 대중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역할을 부여했다. 탈춤이나 굿 같은, 민간 극단은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전통 연희를 창작해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연극계에선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 기관들의 의지 부족 탓에 블랙리스트 사태 해결이 여전히 매듭지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다. 문체부가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로 윤미경 전 국립극단 사무국장을 임명했다가 철회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립극단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가 징계를 권고한 3명 중 퇴사한 2명을 제외한 1명에 대해서만 ‘경고’ 조처를 내려 입길에 올랐다. 이성열 예술감독은 “징계 권고안에 따라 최소한의 징계를 실행했다. 징계 대상자는 문체부 관련자의 지시 사항을 극단 내부 회의에 그대로 전달한 것뿐이어서, 경미한 것에 포함된다 판단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고 연극계도 홍역을 앓고 있다. 아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으며 연극계가 정부 지원금에 기대는 것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고 하자, 이성열 예술감독은 “정부 지원에 기대지 않고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고 말했다. “자립하라는 건 시장 논리에서는 아주 약한 상인에게 대기업과 싸우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학로 극장은 상업 극단들이 다 점령하고 있다. 연극이란 문화산업 자체가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공정한 지원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는 “대학로에 극장이 300개 정도 되지만, 상업극을 제외한 연극을 올리는 극장은 몇곳 안 되기 때문에 정부가 공간을 마련해서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탁해서 대학로에 30~40개의 공공 대관 극장을 확보하는 게 연극인에게 가장 좋은 지원책”이라고 말했다.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예술가 이성열 그는 “예술감독으로서 1년에 최소한 두편의 작품을 하고 싶다”며 연극인으로서의 포부도 밝혔다. 복귀작으로 <오슬로>를 택한 이유에 대해선 “우리 한반도 정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슬로>는 1993년 노르웨이의 한 부부가 비밀협상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평화협정을 맺는 오슬로협정의 뒷얘기를 다뤘다. “미국의 한마디 한마디에 흔들리는 위태로운 한반도 현실이지만 가능성과 희망을 봐야하지 않겠나.” 그는 “세월호 이후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던 것처럼 블랙리스트와 미투, 최근의 남북관계 변화 역시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연극을 잉태할 것이다”고 말했다.
연극인 이성열은 본래는 서울 영등포 재개봉관에서 주말마다 영화를 보는 할리우드 키드였으나 “자본이나 메커니즘에 종속되는 영화보다 연극이 좋아” 무대로 향했다. 1998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출상을 시작으로 수많은 상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인이 됐다. 어떤 연출가가 되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특별한 사명감, 좌우명, 미학 이론 같은 거 없다. 농부가 농사짓듯 내가 좋아하는 땅에서 발에 흙 묻히면서 살아가는 것이 내 직업이다. ”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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