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12일 디엠제트 아트페스타 행사가 열린 강원 양구군 성황지 주변에 놓인 서약의벽. 참가자들이 손도장과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적었다. 아트페스타 사무국 제공
비무장지대(DMZ)가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디엠제트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는 합의가 담기면서 비무장지대에서 열리는 문화예술 행사가 부쩍 늘고 있다. ‘디엠제트 국제다큐영화제’ ‘디엠제트 평화콘서트’ 등 정례화된 공연들 외에도 디엠제트를 무대로 한 새로운 문화예술행사들이 잇따라 선보이는 중이다. 강원도 철원에선 ‘디엠제트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6월), 통일 퍼포먼스로 채운 ‘디엠제트 피스캐쳐’(7월)가 열렸고, 이달엔 강원도 양구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 경기도 파주 ‘디엠제트 평화정거장’ ‘린덴바움 페스티벌’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6·25최대 격전지 강원도 양구 일대
희생 넋 위로하는 영혼콘서트 등
국내외 예술인 3천명 모여
2박3일 ‘DMZ 아트페스타’ 한마당
미군 떠난 파주 그리브스 캠프
탄약고가 미술 전시장으로 바뀌며
부대 볼링장선 오케스트라 공연
두달 전 철원 민통선 안 월정리역 앞에선
‘피스트레인’ 뮤지페스티벌도
대치 상징 접경지, 판문점 선언 뒤
정부서도 ‘평화관광지구’ 조성 관심
개방·포용성 커지며 행사 잇따라
중장기적 남북교류 확대 중심지로
■ ‘시래기 축제’밖에 없던 양구에 예술인들이 북적북적
“가다 멈추시면 안 되고 포토존에서만 촬영 가능하십니다. 차량 한 대 통과.” 지난 11일 강원도 양구군 을지전망대 입구에 이르자 군인들이 트렁크를 열고 차량 검문을 시작했다. 앳된 얼굴의 군인은 안내말과 함께 ‘출입’이라고 쓰인 스티커를 차량 앞유리에 붙였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 오른쪽 철책 너머가 북한이라는 일행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사전 출입신청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을지전망대는 지난 10~12일 열린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의 무대 중 하나다.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는 국내외 예술인 등 3천여명이 종전을 넘어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프로젝트다. 양구군민이 1300명이니 주민보다 예술가들이 훨씬 많았던 셈이다. 이날 해안면 일대 제4땅굴, 성황지, 철공소 등 곳곳에선 버스킹 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펀치볼마을(화채 그릇 모양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은 6.25 최대격전지 중 하나다. 황운기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 제작감독은 “디엠제트 문화예술행사가 철원과 고성에 집중돼 있고 격전지였던 양구에선 의외로 열린 적이 없다”면서 “아트 페스타는 유명 연예인이나 예술인은 없지만 예술가들이 공연자이자 관객이 되는 행사로 미국 ‘버닝맨 페스티벌’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버닝맨 페스티벌은 해마다 8월 말 미국 네바다주 사막에서 열리는 축제다. 1986년 예술가 래리 하비가 3m에 가까운 나무 인간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인 ‘버닝맨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 축제 기간인 일주일 동안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형식 없이 자유롭게 공연을 펼치는데 아트 페스타도 비슷한 형식을 취했다.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디엠제트 아트페스타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인 ‘영혼콘서트’에서 무용수들이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춤을 추고 있다. 아트페스타 사무국 제공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의 하이라이트는 이날 저녁 성황지에서 열린 ‘영혼콘서트-생환’이었다. 전쟁에 희생된 영령들에게 평화의 시대가 왔으니 돌아오라는 주제를 담아 다양한 춤과 노래 공연이 펼쳐졌다. 존 레넌의 ‘이매진’이 흐르고 평화의 촛불을 든 관객과 예술가들은 함께 이 땅의 평화를 기원했다. 펀치볼 주민인 박창호(66)씨는 “1956년에 이 지역에 들어왔는데 유골들이 많아 군인들이 계속 퍼날랐다”면서 “양구에 살면서 이런 행사는 처음 보는데 조국을 위해 죽은 영혼들이 오늘 공연을 보면 기뻐할 것 같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디엠제트는 공간과 예술이 만나 평화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면서 “형식적인 안보교육보다 이런 문화예술을 통해 전하는 감동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평화정거장 예술창작전시’에서 선보인 김명범의 ‘플레이그라운드’. 캠프 그리브스 체험관 제공
■ 파주 옛 미군부대가 작가들의 놀이터로
디엠제트로부터 2㎞ 가량 떨어진 경기도 파주의 캠프 그리브스는 1953년부터 50년 가까이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민통선에서 유일하게 미군으로부터 돌려받은 군 기지다. 2004년 미군 철수 뒤 방치되다 2007년부터 ‘안보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엔 ‘디엠제트 평화정거장 사업’을 시작해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신 중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예술창작전시다. 김명범, 박찬경, 정문경 등이 참여해 캠프 곳곳에 17개 미술작품을 전시 중이다.
12일 찾은 캠프 그리브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명범의 ‘플레이그라운드’ 연작이었다. 전쟁무기를 보관하던 탄약고 두 곳에 각각 미끄럼틀과 그네, 박제된 큰 사슴을 설치했다. 녹슬고 두꺼운 철문을 열었을 때 마주하는 이 평화로운 전시물들은 신비롭기도 하고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캠프 그리브스 디엠제트 체험관의 박미연 대리는 “탄약고는 긴장된 대치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서 “미끄럼틀이 있는 공간은 사람의 놀이터, 사슴이 있는 공간은 동식물의 놀이터를 의미하며 디엠제트가 평화의 상징이 되길 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경기도 파주 캠프 그리브스의 옛 볼링장에서 린덴바움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하고 있다. 린덴바움 페스티벌(김응균 작가) 제공
캠프의 마지막 주둔 부대였던 506부대가 사용했던 볼링장에서는 이날 린덴바움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렸다. 철골이 보이는 천장, 페인트와 종이가 얼룩진 시멘트 벽면이 그대로 남겨진 볼링장은 오케스트라가 오를 낮은 단상과 200여석의 플라스틱 의자를 놓는 것만으로 공연장이 됐다. 중국·미국 등 국내외 청소년 50여명으로 꾸려진 오케스트라는 도시유키 시마다 미국 예일대 교수의 지휘로 번스타인의 ‘캔디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등을 연주했다. “스트라이크” 소리가 울렸을 공간에서 다양한 악기들이 화음을 만들어내자 좌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원형준 린덴바움 페스티벌 예술감독은 “전세계 친구들이 디엠제트라는 비무장지대에 모여 음악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며 평화를 연주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에선 미국 유명 작곡가 토드 마크오버 엠아이티(MIT) 미디어랩 교수의 ‘펜스 어 댄스’(fence a dance)가 세계 초연됐다. 첼로, 바이올린, 플루트 등 악기들이 즉흥연주를 하듯 어울린 인상적인 연주였다.
■ 철조망에 갇혀 있던 자연이 영감의 원천
디엠제트 문화예술 공연이 이처럼 다양해진 건 세계 유일의 비무장지대가 세계적인 평화 명소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창겨울올림픽과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잘 알려지지 않은 디엠제트 공간들도 속속 개방됐고, 디엠제트를 관리하는 지차체나 정부에서도 문화예술 행사를 장려하는 분위기다. 특산물인 ‘시래기 축제’ 밖에 없던 양구군에 수천명의 예술인이 모여들었고, 미군부대였던 캠프 그리브스에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의 하모니가 울려퍼졌다.
지난 6월 강원도 철원의 민간인 통제선 안 월정리역과 북한 노동당사에서 성황리에 열린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은 디엠제트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남북청소년 합동공연을 비롯해 판문점 평화공연을 오래전부터 추진해왔던 원형준 예술감독은 “남북관계가 달라지면서 정부가 예전보다 협조적으로 변했다”면서 “사전신청을 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디엠제트가 접근성만 좋아진다면 더 많은 공연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태도도 한결 유연해졌다. 박미연 대리는 “주말마다 캠프 그리브스 주변에서 국악, 마술 등 거리공연을 하는데 수색대대 장병들도 나와 공연을 즐긴다”고 말했다.
6월23일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에서 열린 디엠제트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오프닝 공연에서 선우정아가 노래하고 있다.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사무국 제공
예술인들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한동안 쓰여지지 않아 폐허처럼 남은 건물들의 대비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는다. 아트 페스타에 참여했던 이현주 무용가는 “디엠제트에서 공연을 하다보니 우리가 마치 자연의 소품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인공적인 요소를 덜어낸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디엠제트를 친근한 관광지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도 쏟아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경기 김포·파주, 인천 옹진군, 강원도 고성 등 접경지 10곳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10경10미’를 지난달 발표했다. 강원도는 고성 평화걷기, 철원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양구 디엠제트 아트 페스타 등 굵직한 행사 외에도 접경지역 5개군에서 소규모 상설 문화행사를 지속하기 위해 지난달 티에프를 발족했다. 오제환 강원문화재단 사무처장은 “관광객이 늘면 문화예술공연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이라면서 “공간 속에서 철학과 컨셉을 보여줄 수 있는 중장기적인 프로젝트들이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이 평화를 향해 한발짝씩 다가갈수록 디엠제트의 의미도 더욱 각별해질 것이다. “남북으로 철도가 개통돼 시베리아까지 달릴 날이 머지않았다”며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서 노래했던 강산에의 말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제안한 ‘동아시아 철도공동체’로 실현된다면, 디엠제트는 남북문화교류의 허리 구실을 할 수 있다. 오제환 사무처장은 “사전신청을 해야 디엠제트로 들어갈 수 있는 번거로움이 평화가 없을 때 생기는 불편함”이라면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이곳에서 남북이 하나되는 공연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양구/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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