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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허스토리’ 그들의 히스토리가 묵살했던 그녀들의 이야기

등록 2018-07-28 09:25수정 2018-07-28 14:19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영화 <허스토리>의 가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허스토리’ 중 한 장면. 뉴(NEW) 제공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허스토리’ 중 한 장면. 뉴(NEW) 제공
28일 서울에선 영화 <허스토리>(2018)의 3차 단체관람 행사가 열린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행사다. 좋은 영화가 자본의 논리 탓에 관객과 만날 기회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채 극장에서 내려가는 게 부당하다 생각한 관객들이, 뜻과 돈과 마음을 모아 스크린을 빌린 것이다.

행사에 참여한 관객 중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몇번이라도 극장에서 반복 관람하겠다고 말하는 관객들이다. 이미 영화가 인터넷 주문형 비디오로 공개됐지만, 집에서 작은 화면으로 혼자 보는 것과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감동을 공유하는 것은 또 다르지 않나. 상황이 이러니, 지난 19일 열렸던 2차 단체관람 행사에는 상영관을 찾아 대전에서 서울까지 온 관객도 있었다. 아예 지역 자치단체에서 단체관람을 추진한 사례도 등장했다. 시의원 시절부터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 생존자 문제에 발 벗고 나섰던 정명희 부산 북구청장은, 지난 25일 북구 주민들과 함께 <허스토리> 단체관람 행사를 진행했다.

위안부 문제, 한국 사회도 자유롭지 않아

사람들은 <허스토리>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이처럼 마음을 다해 영화를 사랑하는 걸까? 작년에 개봉한 <아이 캔 스피크>와도 일맥상통하는 덕목이지만, <허스토리>는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 생존자 문제를 다룬 상업 영화 중 그 태도가 손에 꼽힐 만큼 사려 깊은 영화다. <허스토리>는 이 문제를 가장 흔한 프레임인 ‘민족의 설움’ 안에 넣고 평면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전쟁 중에 여성을 집단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한 것은 일본 정부이지만, 피해 여성들이 오랜 세월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 채 속앓이만 하며 살도록 만든 책임으로부터 한국 사회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자성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더러운 여자들”이라 여기는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위령비 하나도 못 세우겠다는 시장(송영창)의 말에서, 관객은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해온 정절 이데올로기가 위안부 문제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가장 먼저 비난과 의심을 보내는 건, 일본인이 아니라 문정숙(김희애)이 귀갓길에 만난 한국인 택시기사(리민)다. “할마시들이 쪽팔린 줄 알아야지. 몸 팔았다고 방송에 나와 떠들지 않나. 저거 다 돈 받아 처물라꼬 저라는 거 아닙니까?”

적은 스크린 수 아쉬워한 관객들
돈과 마음 모아 단체 대관 관람

흔한 민족주의 프레임 벗어나
한국 사회의 책임 역시 자성
위안부 피해자에게 바치는
손에 꼽을 만큼 사려 깊은 헌사

다수의 여성 캐릭터 등장 덕에
‘완벽한 여성’ 강박에서 벗어나
실수하며 성장하는 모습 보여줘
“세상이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뀐다”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자는 정숙의 말에 박순녀(예수정)는 “이런 거는 대통령이든 저기 높은 양반들”이 대신 나서서 해줘야 할 일이지, 자신과 같은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 말한다. 그러나 자국 내에 위령비 하나도 못 세워주고 쩔쩔매는 이들이, 할머니들을 대리해 일본과 소송을 진행할 리 없다. 결국 여성이 당한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그 책임을 묻고 싸우는 일은 여성들이 직접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뒤에야 비로소 진행됐다.

정숙과 그의 딸 혜수(이설), 정숙의 부하 직원으로 출발해 한명의 어엿한 활동가로 성장한 선영(이유영), 신사장(김선영)과 부산여성경제인협회, 후쿠오카 후원회의 여성들, 그리고 소송의 원고단이었던 열명의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 생존자들. <허스토리>는 이처럼 여성의 피해 사실을 묵살하거나 수치스럽다며 생략해온 역사(History)는 사실 남성의 서사(His-story)이며, 그 이면에는 연대하며 투쟁해온 여성의 서사(Her-story)가 고스란히 살아 있음을 말한다.

다양한 연령대와 위치의 여성 주인공들이 함께 등장한 덕분에, <허스토리>는 그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 종종 강요되어왔던 “흠 없이 완벽한 인물일 것”이란 강박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다수의 남성 캐릭터가 앙상블을 이루는 영화 속에 여성 캐릭터가 고명처럼 한두명 들어갈 경우, 우린 그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놓고 노심초사했다. 여성이 의존적으로 그려지면 너무 의존적으로 그려진다고 아쉬워했고, 무뚝뚝하게 그려지면 너무 무뚝뚝하게 그려진다고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너무 완벽한 인물로 묘사되면 현실감이 없다고 불안해했다. 그 세계 안에서 남성은 다양한 캐릭터로 재현되지만, 여성이 재현될 창구는 딱 그 한두명으로 제약되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여성 캐릭터 하나가 어떻게 묘사되는가 하는 문제는 사실 여성 전체가 어떻게 묘사되는가 하는 문제와 다름없다.

<허스토리>는 다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선 더 이상 한두명의 여성 캐릭터가 여성 전체를 대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캐릭터에 다소 흠이 있어도 그걸 여성의 흠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흠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훌륭한 성장 영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허스토리>는 훌륭한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에게 단점이나 실수를 허락할 여유가 생기자, 자연스레 인물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할 공간도 열린 것이다. 극의 중심인물인 정숙을 보자.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낸 가사도우미 여성 정길(김해숙)이 사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숙은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사실을 몰랐던 시절, 정길이 듣는 앞에서 피해 생존자들을 모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숙은 딸 혜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겁을 준답시고, 티브이에 나와 제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피해 생존자를 두고 “네 나이 대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인생 전체가 어그러진 사람”이라 말했다. 그때 정길이 조용히 중얼거린 혼잣말, “문 사장 무서운 사람이네”라는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정숙은 혼자 어둑한 층계참에 서서 정길을 기다린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났을까 혼자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삭이던 정숙은, 정길을 본 순간 엉뚱하게 대뜸 화부터 낸다. “와 얘기 안 했어예?! 우리가 같이 산 게 몇년인데?”

제 잘못에 대한 분노를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 서툰 사람은,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후에도 자꾸만 실수를 반복한다. 정숙은 피해 생존자인 줄 알고 찾아갔던 홍여사(박정자)가 사실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정색을 하며 비난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래 숨 쉬고 사니까 좋습니까?” 때론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선이 모호하고 복잡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의 정숙은 미처 알지 못한다. 그는 자꾸만 증언이 오락가락하는 할머니들에게 화를 내고, 소송에서 이기는 것에 몰두하느라 애써 지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게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종종 까먹는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숙을 보며 이상일 변호사(김준한)는 질렸다는 듯 말한다. “문정숙씨 정말 징그럽네요.” 그러니 <허스토리>는, 이 ‘징그러운’ 인물이 자신의 오만과 조바심과 분노와 좌절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가면서 한명의 활동가로 성장하는 성장담이기도 하다.

<허스토리>는 탁월한 여성 영화이고, 일본군 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 생존자들에게 바치는 사려 깊은 헌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끊임없이 개선하고 성장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영화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충분히 도덕적이거나 현명하지 않다고 화를 낸다. 타인이, 혹은 나 자신이, 실수 하나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길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화를 내고 체념하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천천히 세상에 걸었던 희망을 잃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우리 중 대부분은 성장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잘못과 실수를 저지른다.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예.” 정숙의 말이 맞다. 세상은 이미 완벽한 사람들이 바꾸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바꿔나가는 것이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허스토리>를 보며 그와 같은 희망을 되찾을 수 있길 바란다. 기왕이면 극장에서라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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