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학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이 오는 27일 새 판소리 <빨간 피터 이야기>를 선보인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이제부터 이 소리꾼이 프란츠 카프카의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바탕으로 이 궁~리, 저 궁~리 이리저리 궁리해서 판소리로 우리 말맛도 살려보고(중략) 진양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에 맞추어 사설에 어울리게 너름새(몸짓)도 펼쳐가며 풀어내면 여러분들은 ‘얼씨구’ ‘좋다’ 그렇게 추임새로 받아보며 함께 즐기는 ‘빨간 피터 이야기’로구나~.(얼쑤)”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가 판소리 <빨간 피터 이야기>로 탄생했다. 마포문화재단의 국악페스티벌 ‘온고지신’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오는 27일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이 판소리를 만든 지기학(54)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을 16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원숭이 ‘빨간 피터’가 학술원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인간화 과정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고 추송웅씨가 이를 연극으로 만든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소설을 창본으로 각색하고, 작창(노래를 만드는 것)하고, 무대에서 직접 소리도 하는 지 감독은 “판소리는 소리꾼의 이야기로 문학을 전달하는 구실을 해왔다”면서 “새 판소리를 고민하던 차에 독백 형식의 모노드라마인 이 작품이 판소리 양식 속에서 새롭게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지 감독은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이면서 극단 미추에서 활동했던 창극 전문가다. 국립민속국악원의 창극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 국립국악원 ‘작은 창극 시리즈’ 연출 등을 맡아 20년 넘게 활동해왔다. “좋은 창극을 만들려면 창극의 원형인 판소리가 잘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판소리에 몰두하게 됐다는 그는 연극을 했던 경험을 살려 새 판소리 <빨간 피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창작엔 꼬박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빨간 피터 이야기>는 관객과의 소통인 단가(연창에 앞서 목을 풀거나 청중의 반응을 살피는 노래) 20분에 이어 빨간 피터의 독백이 50분간 이어진다. 지 감독은 “판소리에서 독백이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면서 “연극적인 독백의 힘에 판소리의 너름새 힘이 조합되어 원숭이 분장 없이도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에서 빨간 피터가 연미복에 빨간 보타이를 했던 것과 달리 지 감독은 소갓과 두루마기를 쓰고 무대에 선다. 단가가 끝날 때쯤 갓과 두루마기, 버선을 벗고 검은색 실내복을 입은 채 맨발로 소리를 할 예정이다. “가창을 통해 광대짓을 하는 게 소리꾼인데 이번 공연은 판소리를 해체해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복장도 풀어헤치고 편하게 시작해요.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판소리 종지를 기존의 ‘했더라’가 아니라 ‘했습니다’로 바꿨고, 종지에 따라쳐야 할 박을 고수가 안 치기도 하죠.”
연극적인 요소를 결합한 이번 공연 외에도 그는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춘향실록-춘향은 죽었다>의 눈 내리는 장면에서 판소리 창법으로 편곡된 샹송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를 들려줬고, ‘적벽가’를 소재로 한 작은 창극 <화용도 타령-타고 남은 절벽>에서는 전장의 장수들을 여성소리꾼으로만 구성하기도 했다. “<빨간 피터 이야기>는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카프카의 작품을 소리꾼인 제가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요. 몇년 뒤엔 이걸 바탕으로 창극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죠. 소리꾼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따라가다 보면 원작을 알든 모르든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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