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음악학교라는 미국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을 다녔지만 거드름 피울 시간은 없었다. 뉴욕의 물가는 비쌌고, 돈을 벌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금호아트홀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48)는 눈을 껌뻑이며 기억을 떠올렸다. 카네기홀 단골 초청연주자인 그가 예식장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했던 시절을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을 받은 뒤였다.
“가장 끔찍했던 아르바이트는 뉴욕의 계절을 담는 비디오를 찍는 거였어요. 바닷가에 놓인 흰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는데 머리 위로 헬리콥터가 빙글빙글 도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더군요. 오래된 골동품 가게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어요.”
학생 시절 생계를 이어가기 바빴던 그는 이제 미국을 대표하는 중견 연주자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 등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은 덴크는 천재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불리는 ‘맥아더 지니어스 펠로우십’(2013)과 미국 클래식 연주자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상(2014)을 받은 이후 ‘천재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이 생겼다. 그가 7일 한국에서 첫 독주회를 연다. 덴크는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부르는 건 사람들이 저를 놀리느라 그런 것”이라며 웃은 뒤 “맥아더 펠로우십은 저에게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저주 같기도 하고, 사실은 영광스러운 상”이라고 말했다.
덴크의 재능은 연주에만 그치지 않는다. 글 쓰는 재주도 탁월하다. 자신의 블로그 ‘싱크 덴크’(Think Denk·덴크를 ‘싱크탱크’에 결합한 이름)에 음악과 예술에 대해 쓴 글들이 유명해지면서 <뉴요커> <가디언> 등에서 칼럼니스트로도 활약 중이다. 그의 블로그는 미국 의회 도서관 웹 아카이브에도 선정돼 보관 중이다. 음반마다 해설을 직접 쓰고, 오페라 대본도 집필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 듣고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책장 아래칸엔 음반이, 위에는 책이 있어서 책 읽으며 음악 듣는 게 자연스러웠죠.” 수없이 홀로 연습하는 음악이 고독해 남과 나누고 싶은 욕구를 글로 배출한다는 그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곡을 글로 쓰는 게 연주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날 아침에도 오는 9월에 발매할 앨범의 해설노트를 쓰고 왔다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선율 말고 내가 생각하는 음악적 구도를 글로 설명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모차르트, 프로코피예프, 베토벤, 슈베르트에 이르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프로코피예프 ‘20개 찰나의 환영’,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은 그가 특별히 아끼는 곡들이다. 본래 2부 공연에서 리스트와 슈만의 연주곡을 선보이려 했지만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으로 변경했다. “1부 연주곡인 베토벤 30번과 2부의 슈베르트 21번은 두 작곡가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쓴 곡들이에요. 인생에 바치는 두 가지 관점으로도 볼 수 있는데 베토벤은 응집해서 표현하고, 슈베르트는 넓게 확장된 느낌을 줘 비교하며 듣는 재미를 느끼실 것 같아요.”
천재도 나이 탓인지 이름은 깜빡깜빡한다. 전날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저녁을 먹었다는 그는 친한 한국인 연주자들을 얘기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김, 박?”이라는 힌트도 소용없었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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