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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레드북’ 여자의 야한 상상이 왜? 뭐!

등록 2018-03-04 17:11수정 2018-03-04 19:06

미투 관통하는 사이다 뮤지컬 ‘레드북’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배경
야한 소설 쓰는 안나의 잡지 ‘레드북’
차별·학대로 상처 받은 여성들 뭉쳐
편견 맞서 정체성 찾는 과정 그려
무거운 주제 유쾌한 전개…객석 웃음꽃
뮤지컬 <레드북>. 피알엠(PRM) 제공
뮤지컬 <레드북>. 피알엠(PRM) 제공
“평론은 섹스예요. 작가와 평론가의 영혼이 나누는…. 작가는 아무래도 경험이 필요하죠. 피부로 느끼는 생생한 경험.”

유명 평론가가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에게 좋은 평론을 써주겠다며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당신의 작품에는 한계가 있다”며 작가의 팔을 쓰다듬더니 “재능을 일깨워주겠다”며 바지를 벗는다. 요즘 쏟아지는 #미투 운동 속 폭로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중요한 건 다음 장면이다. 평론가의 사타구니를 뻥 차고 나온 작가는 분해서 씩씩대는데 “다친 평론가가 이 일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주는 친구는 “이 정도이길 다행”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발끈한다. “강제로 추행해놓고 없던 일로 만드는 게 다행이라고요?”

창작 뮤지컬 <레드북>이 흥행몰이 중이다. 여성이 글을 쓸 수 없던 시절, <레드북>이란 잡지에 자신의 사랑과 쾌락에 대한 솔직한 글을 써 사회적 비난을 받는 안나의 성장 이야기를 가슴 뭉클하게 담은 이 작품을 놓고 “현재 사회 분위기에 딱 맞는 작품” “시대가 원하는 뮤지컬”이라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레드북>은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다.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는 엉뚱하지만 당당한 안나는 고지식한 변호사 브라운의 응원에 힘입어 야한 소설을 쓴다. 남편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여성들이 모인 ‘로렐라이 문학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잡지 <레드북>을 만든다. 레드북은 근엄하고 정숙한 척하는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안나는 자신이 발로 걷어찬 평론가의 악의적 선동으로 사회적 비난 속에 구속돼 강제 추방 위기까지 몰리지만 자신이 쓴 글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투성이 세상에 오답으로 남겠다”며 편견에 맞서 싸운다.

<레드북>의 대본을 쓴 한정석 작가는 “그간 가져왔던 문제의식들을 녹였더니 요즘 문제가 되는 미투를 연상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투 피해자들의 폭로에 함께 분노했던 이들은 “왜 찝쩍대세요. 발정 나셨어요? 감당도 안 되고 관리도 안 되는 그거 자릅시다”라며 못된 입들에 자물쇠를 거는 안나의 모습에 속이 뻥 뚫린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다소 무거운 주제지만 영리한 장치들이 무게감을 덜어낸다. 귀에 쏙쏙 박히는 음악과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아이를 남편에게 뺏기고 인형을 들고 다니는 도로시, 자유분방해서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은 친구 로렐라이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여장 남자 등은 웃음을 맡은 약방의 감초들이다.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는 “<레드북>은 안나처럼 상처받은 여성들이 만나 자기 말 하기를 하며 연대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흥겹지만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 작가는 “3년 전에 대본을 쓸 때만 해도 왜 페미니즘적 시각이 담긴 작품을 쓰냐는 주변의 시선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기 적절하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어리둥절하다”며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이 일으키는 변화가 <레드북>을 곧 낡은 이야기로 바꿀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엠(M)씨어터. 문의 1544-1555.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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